미국 엔비디아가 31일 한국 정부, 민간 기업에 인공지능(AI) 반도체로 활용되는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거 공급하는 협력 방안을 발표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 여파로 중국 시장 점유율이 축소된 엔비디아가 돌파구로 한국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정부와 민간 기업이 엔비디아와 대규모 GPU 계약을 맺으면서 AI 모델 연구개발(R&D)에 발목을 잡았던 'GPU 수급난'을 해결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일각에선 한국 기업이 엔비디아에 메모리 반도체 등을 판매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GPU를 되사는 '순환 거래'가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엔비디아는 이날 한국을 'AI 소버린' 구축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우리 정부와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차그룹, 네이버클라우드, LG그룹에 첨단 GPU 26만장을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10조원을 크게 웃도는 규모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이를 바탕으로 한국 내 GPU 인프라를 약 6만5000장에서 30만장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한국 정부는 기업·기관이 자국어·자국 데이터로 AI 모델을 학습할 수 있도록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고, 각 기업은 회사가 수립한 AI 전략에 맞춰 엔비디아 첨단 GPU를 활용할 방침이다.
◇ "엔비디아 中 시장 점유율 0%"… 韓이 돌파구로 급부상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 민간 기업과 10조원 규모의 초대형 AI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으로 위축된 중국 시장을 대체할 대안으로 한국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시타델 증권 행사에서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에 따라 중국 본토 기업에 첨단 제품을 판매할 수 없게 됐다.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95%에서 0%로 떨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AI 데이터센터를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시장은 전 세계에 몇 군데 되지 않기 때문에 AI 반도체를 공급하는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대단한 기회"라며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를 둘러싼 갈등이 진화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한국이 매력적인 대안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AI 반도체에 탑재되는 첨단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세계 1, 2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포진한 한국 기업과의 협력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엔비디아는 AI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큰손'으로 군림해 왔지만, 구글과 아마존, 메타, 오픈AI 등이 자체 AI 칩을 개발에 뛰어들면서 점유율이 점차 줄어들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황을 이끌었던 HBM 사업의 성패를 그동안 엔비디아가 쥐고 흔들었다면, 앞으로는 HBM 고객사가 다변화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며 "엔비디아도 원활한 HBM 수급을 위해 한국 기업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 "GPU 수급난 해결"vs"HBM 팔아서 GPU 산다"
이번 발표를 통해 그동안 산업계와 학계가 시달려왔던 'GPU 수급난'이 해결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 세계적인 AI 산업의 성장세로 AI 반도체 시장 1위인 엔비디아에 주문이 쏠렸지만, 이를 제조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의 제한된 생산 능력으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엔비디아 GPU 확보가 국가의 AI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IT업계는 엔비디아 GPU 수급난에 시달렸다.
다만,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와 SK그룹 등이 GPU를 대거 구매하는 것을 두고 일종의 순환거래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엔비디아에 HBM을 대거 공급하고 있는데, 결국 엔비디아에 "HBM 판매해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엔비디아 GPU를 구매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IT업계 관계자는 "이번 협력을 계기로 산업계와 학계의 AI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다만, 엔비디아가 한국 측에 GPU를 대량 판매한다는 것 외에 정부와 민간이 수익을 낼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지는 않아 일부 발표 내용을 두고 순환거래가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긴 힘들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