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한 전자제품 매장에 노트북들이 진열돼 있다./연합뉴스

"중국이 과거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에서 한국을 무너뜨린 방식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서도 그대로 재현하려 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의 정윤성 상무는 21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에서 옴디아 주최로 열린 '한국 디스플레이 컨퍼런스'에서 중국의 디스플레이 추격 상황을 이같이 진단했다. 중국이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LCD 시장의 독점적 수익을 바탕으로 IT용 OLED에 공격적 투자를 이어가고 있어, 과거와 같은 시장 잠식이 재현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는 한국과 중국의 OLED 기술 격차가 1년 남짓으로 좁혀진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차세대 핵심 공정인 8.6세대 투자 경쟁에서는 한국이 이미 중국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고 있다.

◇ 中, 'LCD 승리 공식'으로 8.6세대 정조준

이날 전문가들은 향후 5~7년간 디스플레이 산업의 차세대 격전지로 IT(노트북·태블릿 등) OLED를 꼽았다. 기존 스마트폰용 OLED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고 TV용 OLED 시장 성장이 더딘 상황에서, IT용 OLED 시장이 핵심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는 분석이다. 박진한 옴디아 이사는 "AI PC의 본격적인 등장과 애플이 내년 하반기부터 맥북 프로 등에 OLED를 탑재할 계획으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며 "스마트폰에 이어 IT 기기가 OLED 시장의 다음 성장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중국이 이 시장에서도 LCD 시절의 '승리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중국은 10.5세대 LCD 라인에 집중 투자해 65·75인치 등 대형 패널을 저가로 쏟아내며 한국 LCD 디스플레이 산업을 무너뜨렸다. 막대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투자로 생산능력(캐파)을 확보한 뒤, 저가 공세로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이 전략은 차세대 핵심 공정인 8.6세대 IT용 OLED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8.6세대는 기존 6세대보다 더 큰 유리 원판을 사용해 IT 기기용 패널의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는 차세대 기술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삼성디스플레이가 유일하게 내년 초 양산을 목표로 월 1만5000장 규모의 투자를 진행 중이다. 반면 중국은 BOE, CSOT, 비전옥스, 티안마 등 4개 업체가 8.6세대 투자를 잇달아 발표했고, BOE는 내년 하반기 양산을 계획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재정난과 수요처 확보 문제로 아직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어, 사실상 '4대 1' 구도가 형성된 상황이다.

박 이사는 "현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28년 8.6세대 IT용 OLED 생산능력의 64%를 중국이 차지하며 한국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며 "기술 우위가 있더라도 캐파에서 밀리면 시장 주도권을 지키기 어렵다"고 말했다.

◇ 'LCD 돈으로 OLED 간다'… IT서 TV까지 '양면전선' 우려도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이처럼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설 수 있는 배경에는 막대한 정부 보조금과 LCD 시장에서 벌어들인 독점적 수익이 맞물린 '투자 선순환 구조'가 있다. 중국은 LCD 시장에서 이미 TV 패널 점유율 70%, 모니터 패널 점유율 68%로 사실상 독과점 체제를 굳혔다. 점차 이익도 개선되자, LCD에서 벌어들인 자금이 차세대 OLED 투자로 흘러드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여기에 중국 정부 보조금이 더해지면서 저가 공세로 이어진다. 중국 정부는 투자금의 절반가량을 직접 지원하고, 일정 가동률을 유지하면 추가 보조금까지 지급한다. 정 상무는 "이 때문에 손실을 감수하고서도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며 "한국이 100만원에 제품을 팔면 중국은 70만원에 팔아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8.6세대 IT 라인을 향후 TV용으로 전환할 가능성에도 주목한다. 정 상무는 "중국 업체들이 처음엔 IT용 패널로 시작하더라도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결국 TV 패널 생산으로 확대할 수 있다"며 "BOE는 이미 8.5세대 라인에서 TV를 만든 경험이 있고, CSOT도 잉크젯 방식으로 65인치 TV 샘플을 제작한 전례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IT용과 TV용 OLED를 동시에 생산할 경우,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는 떠오르는 IT OLED 시장뿐 아니라 TV 시장에서도 이중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 상무는 "중국은 한국이 주력하는 IT 시장의 기반을 흔들면 디스플레이 생태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며 "국내 업계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