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 경제경영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해 KT 최고경영자(CEO) 자리까지 오른 구현모(61) 전 KT 사장. 그는 현재 카이스트 산업공학과와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카이스트에서 'AI 시대의 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되는 수업은 실무자이자 CEO 출신 특강으로 입소문을 타 인기를 끌고 있다.
구 전 사장은 2020년 3월 황창규 회장에 이어 CEO를 맡아 2023년 3월까지 3년간 회사를 이끌었다. 2002년 민영화 이후 KT 내부 출신이 CEO에 오른 것은 이용경 전 사장(2002년), 남중수 전 사장(2005년), 구 전 사장 3명뿐이다.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경영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구 전 사장은 기술 흐름을 읽는 통찰력을 가진 리더로 평가된다. KT CEO 재직 시절 그는 "인공지능(AI)을 이해하는 리더가 돼야 기업이 생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주 던지며 기술과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리더십을 강조했다. 특히 구 전 사장은 AI 컴퍼니로 전환을 추진 중인 KT의 초석을 다진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통신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며, AI를 중심축으로 한 체질 개편을 추진했다. 초거대 AI 상용화, AI 인프라 혁신, 미래 인재 양성 등을 3대 전략으로 제시하며 KT의 AI 사업 확장을 주도했다. 그 결과 2022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 25조원을 돌파하며 역대 CEO 가운데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구 전 사장은 올해 1월 AI 시대 기업 리더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담은 '더 사프니스(The Sharpness)'라는 책을 출간했다. 자타공인 AI 전문가이지만 AI 관련 책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AI 기술 발전 속도가 전광석화 같은데, 책을 쓰면 이미 그 내용은 옛날 내용이 돼 버린다"며 "AI 서적을 출판할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고 미소 지었다.
그의 최근 관심사는 AI 벤처 회사를 발굴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기업과 연결해 AI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조선비즈는 지난 15일 구 전 사장을 만나 AI 시대 리더십의 변화와 글로벌 AI 경쟁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구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
ㅡ글로벌 AI 경쟁에서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은.
"대규모언어모델(LLM) 같은 인공지능(AI) 파운데이션 모델 영역에서 미국과 중국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은 제조업과 의료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국가다. AI와 특정 산업을 결합한 새로운 사업 영역에서는 한국도 글로벌 1등이 될 수 있다.
AI 정부 전환도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다. 1997년 추진된 전자정부 전환 과정에서 집행된 정부 예산이 기업의 일거리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키웠던 경험이 있다. AI 정부 전환 사업은 정부의 효율성 향상뿐 아니라 한국의 AI 산업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ㅡ한국 ICT 산업을 바꿀 가장 큰 기술적 변화는 무엇인가.
"AI가 한국 ICT 산업의 가장 큰 변화를 이끌 것이다. 그런데 AI는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르고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와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는 AI 인프라 구축과 소버린(주권) AI 모델 개발에 집중하고, 기업은 AI 활용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ㅡ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글로벌 빅테크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인스타그램, 스포티파이 같은 미국 기업이 만든 서비스가 이미 대세가 됐고, 클라우드 시장도 공공이나 금융 분야를 제외하면 미국 아마존웹서비스(AWS)나 구글 클라우드의 점유율이 높다. 조만간 피지컬 AI 시장에서도 중국의 로봇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몇몇 영역에서는 세계 1등이 나와야 한다.
과거에는 국내 중심 경쟁 탓에 글로벌 관점에서 서비스를 개발하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소홀했다. 이제는 처음부터 미국·중국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서비스를 개발하며, 마케팅과 세일즈를 해야 한다. 앞서 말한 제조업과 의료 분야에 AI를 접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ㅡ글로벌 빅테크 회사들이 통신 인프라까지 잠식하고 있다. 한국 통신사들이 어떻게 차별화해야 하나.
"글로벌 빅테크들이 통신 인프라를 잠식하는 것은 ICT 산업 전체의 문제다. 한국 통신사들이 AI 전환을 통해 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은 AI와 결합된 응용 서비스에 있다. AI 시대에는 통신 사업자의 역할도 변화해야 하며, AI 기반 응용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개발·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망 사업자의 역할은 기술 혁신과 이에 기반한 서비스 제공에 중심을 둬야 한다."
ㅡAI와 디지털 전환을 위해 기술 확보보다 조직문화를 바꾸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디지털 전환과 AI 전환은 기술적 변화뿐 아니라 조직문화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기술을 도입했지만 업무 프로세스가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 AI 도입으로 단순히 업무 속도만 빨라질 뿐, 이를 활용하는 직원들이 성과를 추구하지 않으면 효용이 떨어진다. 성과 지향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기업이 AI 전환에 유리하다.
KT에서 가장 강력하게 시도한 조직문화 혁신 중 하나는 '1등 워크숍'이었다. 1등 워크숍은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관련자가 모여 계급장을 떼고 1박 2일 합숙하며 토론으로 해결책을 도출하는 사내 프로그램이다. 그 해결책은 담당 임원이 듣고 채택 여부를 결정해 실행하고, 결과를 공유하도록 했다. 당시 채택률은 70% 정도로 높았다. 지난 10여 년간 KT의 일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고, KT가 성과 지향적인 조직으로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했다."
ㅡKT가 통신 중심 기업에서 AI·데이터 중심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바꿔야 했던 것은.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 변신하려면 새로운 비전 설정이 가장 먼저 필요했다. 그다음에는 AI 전문가 양성이 중요했다. 고급 AI 전문가 300명, 기초 전문가 2000명을 양성하기 위해 투자했다. 이 과정에서 통신망의 생존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AI·데이터 중심의 서비스 혁신을 병행했다. AI와 클라우드 기술을 결합한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의 변신이 필요했다."
ㅡAI 시대 '좋은 기업 리더'의 조건은.
"AI와 데이터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리더십의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리더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많은 직원들이 AI를 먼저 찾아보며 업무를 추진한다. 리더는 이제 AI와 경쟁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AI 시대의 리더는 단순히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혁신을 이끄는 리더여야 한다. 리더는 조직의 미션과 비전을 강조하고, 직원들이 학습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코워크십(Co-workership·협력적 리더십)'이 중요해질 것이다. 리더는 팀원들과 함께 일하며 변화를 이끄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ㅡKT는 '민영화된 공기업'이라는 독특한 구조 속에서 경영 자율성과 공공성의 균형을 요구받고 있다.
"KT는 민영 기업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민영화된 공기업'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민간 기업으로서 공공성이 중요한 기업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공기업처럼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해관계자들의 올바른 인식이 더 중요하다. 올바른 인식이 있으면 논란도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