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데이터센터./구글 제공

"D램, 낸드플래시, 하드디스크(HDD)까지 4대 주요 메모리 제품이 동시에 부족한 건 30년 업력 사상 처음 겪는 일입니다."

세계 2위 D램 모듈 기업인 대만 에이데이타(ADATA)의 천리바이 회장은 지난 13일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공지능(AI) 서버 시장의 '공룡'들이 전 세계 메모리 수요를 빨아들이면서, 기존 공급망 규칙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입니다.

천 회장은 "이제 우리의 경쟁 상대는 동종 모듈사가 아니라 오픈AI,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CSP(클라우드 서비스) 업체들"이라며 "AI 서버 수요가 폭발하면서 원청(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이들의 주문을 우선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에이데이타는 삼성전자 등 메모리 제조사로부터 칩을 공급받아 완제품을 만드는 '중간 허리'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거대 CSP들이 이 단계를 건너뛰고 칩 제조사들과 대규모 장기 계약을 맺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AI 서버용 고부가 제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과 DDR5에 메모리 제조사들의 생산 역량이 집중되자, 모듈 업체들은 확보 가능한 칩 물량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천 회장은 "AI 서버 공룡들 등쌀에 죽을 맛"이라며 "내부적으로 '물건을 아껴 팔라'는 지침까지 내렸다"고 털어놨습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칩을 구하려는 고객이 줄을 서지만, 향후 가격이 더 오를 가능성을 고려해 출하 속도를 조절하며 핵심 고객 위주로 물량을 배분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처럼 메모리 제조사들의 생산 쏠림은 시장 전체에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구형 제품인 DDR4의 품귀 현상은 수년간 이어질 전망입니다. 서버와 PC 시장은 DDR5로 옮겨가고 있으나, TV와 네트워크 장비 같은 수많은 기기에는 여전히 DDR4가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 회장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DDR4 생산을 사실상 중단하고, 기존 장기 계약만 최소 물량으로 이행하고 있다"며 "한 번 내린 장비를 다시 올리긴 어려워, 최소 2년간 (DDR4) 공급난이 불가피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여파로 DDR4 16Gb(기가바이트) 현물 가격은 석 달 새 약 44%나 올랐고, 1년 전과 비교하면 4배(413%) 넘게 뛰었습니다. DDR5 16G 제품 역시 1년 만에 약 83% 비싸졌습니다.

D램뿐만이 아닙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공급 과잉이던 낸드플래시 시장 역시 급격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클라우드 기업들은 그동안 자주 쓰지 않는 대용량 데이터는 저렴한 HDD에, 빠른 연산이 필요한 데이터는 낸드 기반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에 나눠 저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HDD 공급이 부족해지자, 당장 저장공간이 급해진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기업용 SSD를 사들이고 있습니다. 트렌드포스는 "HDD 감산 여파로 고용량 SSD 주문이 급증하면서 올 4분기 낸드 가격이 평균 5~10%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업계에서는 AI가 몰고 온 이번 메모리 대란이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입을 모읍니다. 재고 조정이나 가격 하락으로 사이클이 꺾이던 시대가 끝나고, AI 인프라 확대로 인한 구조적 수요가 장기 호황을 이끄는 국면이 열렸다는 겁니다. 천 회장 역시 "AI 고정 수요가 과거 3~4년 주기의 메모리 경기 순환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며 "이번 호황기는 최소 2026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장이 밀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