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인공지능(AI) 제작사 시코이아(Xicoia)가 만든 AI 배우 '틸리 노우드'가 지난 9월 28일 스위스 취리히 영화제의 공식 행사인 '취리히 서밋'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배우 에밀리 블런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건 정말 무섭다. 인간적인 연결을 빼앗지 말라"고 말했고, 미국 배우조합 SAG-AFTRA는 성명을 내 "합성 배우는 무단 학습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며 배우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규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발을 업계의 이해관계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소비자들도 곳곳에서 본능적인 불편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미국 스타트업 '프렌드(Friend)'가 뉴욕 지하철에 대규모 AI 광고판을 설치했는데, 시민들의 낙서와 훼손이 이어지면서 현지 언론에서는 "억만달러짜리 AI 캠페인이 조롱당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생활 속에 끼어들었다"는 불편함이 반발로 나타난 것입니다.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가 올해 7월 발표한 설문에서는 전 세계 성인의 45%가 AI 인플루언서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닐슨도 지난 1월 조사에서 AI 콘텐츠를 인지한 소비자의 절반 이상이 "감정적으로 불쾌하다"고 응답했습니다. 겉모습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도 어딘가 낯선 이질감이 결국 '불쾌한 골짜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소비자 불신은 실제 사례에서도 드러납니다. 최근 AI로 만들어진 터키 출신 가상 인플루언서 '에이산 악소이(Eysan Aksoy)'는 인스타그램에서 챔피언스리그 TV 진행자인 것처럼 인식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팬들 상당수는 그가 실제 방송 진행자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방송 경력도, 축구 경력도 전혀 없는 AI 생성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과 7개월 만에 팔로어가 4만3000명 이상으로 늘었고, 일부 팬들은 유료 후원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속았다"는 반발이 뒤따랐습니다. 올해 8월 미국판 '보그'에 실린 게스 광고에서는 금발 AI 모델 '비비안'이 등장했는데, SNS에는 "실존 모델과 비교당해야 하느냐"는 항의성 댓글이 쏟아졌고 수만건의 공감이 달렸습니다.
테크업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소비자 반응과 별개로, 기존 배우들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발로 보고 있습니다. 배우와 모델에게 광고는 단순한 부수입이 아니라 가장 안정적인 수입원입니다. 영화 출연료는 작품마다 편차가 크지만 광고와 브랜드 계약은 장기적이고 꾸준한 수익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패션·화장품 업계를 중심으로 AI 모델 기용이 확대되자 기존 배우·모델들의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해 미국 성우 노조는 액티비전블리자드, 일렉트로닉아츠(EA) 등 대형 게임사와의 협상에서 AI 음성 합성 제한을 핵심 의제로 올렸고, 조합원 98%가 파업에 찬성했습니다. 일부 성우는 "내 목소리가 동의 없이 학습돼 합성 음성에 쓰였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AI 배우·가상 모델, 그리고 생성형 광고를 산업 현장에 빠르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먼저 국내에서는 지난해 4월 서울우유가 배우 박은빈의 아역 시절을 AI로 복원해 현재 모습과 교차 편집한 광고를 공개, 실제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합성한 방식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지난 6월 미국 NBA 파이널 중계에는 온라인 거래 플랫폼 칼시(Kalshi)가 AI로 제작한 광고를 선보여 화제가 됐습니다. 제작에 투입된 비용은 약 2000달러 수준으로, 통상적인 광고 제작비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제작자인 PJ 액체투로는 "수백 차례의 시도 끝에 15개 장면을 골라내 완성했다"고 밝혔습니다. 모바일 게임사 센추리게임즈는 신작 '킹샷(Kingshot)' 홍보 과정에서 AI 광고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중국 기업들도 AI 광고를 빠르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지난 9월부터 '인터넷 정보 서비스 심층합성 관리 규정'을 시행해, AI로 생성된 이미지와 영상에 명확한 표기를 의무화했습니다. 이는 광고와 뉴스 등 전 영역에 적용되는 규제입니다.
시장 전망도 변화를 뒷받침합니다. 미국 인터랙티브광고국(IAB)은 지난 8월 보고서에서 "2026년까지 전체 디지털 광고의 40%가 AI로 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AI 모델이 비용 절감과 창작 유연성에서 분명한 장점을 갖지만, 소비자 불신이 누적될 경우 광고 효과가 반감돼 오히려 브랜드에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김명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AI안전연구소장은 "AI 배우 논란은 배우들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측면이 크다"며 "이미 '파인딩 잭'이나 '스타워즈'처럼 사망한 배우를 되살려 쓰는 사례가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확산되면 살아 있는 배우가 죽은 배우와 경쟁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겉보기엔 단순한 기술 발전처럼 보이지만, 인권 경시와 사자의 명예훼손, 저작권·유산 분쟁 같은 복잡한 문제가 뒤따른다"며 "제도적 논의 없이 기술만 앞서가면 사회적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