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부는 온통 인공지능(AI)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지난달 30일 열린 한국로봇산업협회 임시총회에서 나온 말입니다. 산업계가 정부의 AI 중심 정책 기조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AI 리브랜딩'에 나서고 있습니다. 로봇 관련 회원사 294곳을 둔 한국로봇산업협회는 이날 총회에서 협회명을 '한국AI·로봇산업협회'로 바꿨습니다. 표면적으로는 AI와 로봇의 융합이라는 글로벌 트렌드를 따른 것이지만, 속사정을 보면 정부 정책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깔려 있습니다.
총회에 모인 로봇 기업들은 "정부 트렌드에 맞춰 함께 가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위기감을 공유했습니다. 김진오 회장은 "현 정부의 트렌드는 AI"라며 "로봇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로봇에 AI가 포함돼 있다는 걸 알지만, 밖에서는 로봇을 하드웨어로만 보는 경우가 많아 명칭에서부터 AI를 명확히 넣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 로봇업계 덮친 'AI 패싱' 위기감
협회에는 삼성전자 자회사로 편입된 휴머노이드 개발사 레인보우로보틱스, LG전자와 손잡고 휴머노이드 사업화를 추진 중인 로보티즈, 로봇용 액추에이터 생산 기업 하이젠알앤엠 등 시장의 주목을 받는 기업부터 막 걸음마를 뗀 신생 로봇 스타트업까지 다양하게 속해 있습니다. 한 회원사 대표는 "대기업 계열이라도 요즘은 AI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주요 지원 사업에서 뒤처질 수 있다"며 "작은 업체들은 정부 과제·R&D(연구개발) 지원금에 대한 의존도가 커 더 절박하다"고 말했습니다.
AI가 정부 정책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외부에서는 별도의 'AI 로봇협회'를 만들려는 움직임까지 감지되고 있습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도한 '피지컬 AI 글로벌 얼라이언스' 출범식 명단에서 한국로봇산업협회가 제외된 것도 위기감을 키운 사례로 거론됩니다. 협회 관계자는 "AI는 소프트웨어이고 로봇은 하드웨어라는 인식이 있는데, 요즘은 피지컬 AI가 대세가 되다 보니 정부에서도 로봇·제조·자동차 분야에 AI를 붙이는 걸 긍정적으로 본다"며 "우리도 그런 흐름에 맞춰야 기회가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정부는 AI에 전례 없는 드라이브를 걸고 있습니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 따르면 AI 분야에 투입되는 예산은 10조1000억원에 달합니다. 올해 관련 예산안(3조3000억원)의 3배 규모로, 특정 분야에서 재정 규모를 이렇게 늘린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피지컬 AI 분야에도 로봇 등 중점 사업에 올해 5000억원을 포함해 향후 5년간 총 6조원이 지원됩니다. 과기정통부·산업부·중기부가 함께 피지컬 AI를 국가 어젠다로 밀고 있는 점도 업계에서 "AI 간판이 없으면 낙오된다"는 위기감이 커지는 배경입니다.
◇ 'AI 리브랜딩' 줄줄이 이어져
이는 로봇업계만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는 지난 5월 말 임시총회를 열고 이름을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로 바꿨습니다. 과기정통부 차관이 직접 참석한 현판식까지 열리며 "정부 지원 축에 서려면 AI 간판이 필수"라는 업계 인식을 반영했습니다. 게임 업계도 AI에 올라탔습니다. 한국인디게임협회는 지난달 '한국인공지능게임협회'로 간판을 교체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를 AI·게임 융합 비전을 내세우며 대외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행보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판만 바꾼다고 없던 AI 역량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산업계 관계자들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IT 융합' '녹색 성장' '4차 산업혁명' 등 정권의 핵심 어젠다에 따라 산업계가 간판을 바꿔 달았던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이름에 걸맞은 실질적인 기술 융합과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유행에 편승한 겉치레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 정책 무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이 이름 바꾸기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산업 혁신으로 이어질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