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공지능(AI) 전장(戰場)에서 안심이란 없다. 시시각각 순위가 뒤바뀌는 가운데, 'AI 합종연횡(엔비디아와 오픈AI 파트너십)'과 'AI 버블 논란(메타의 1000억원대 인재 인센티브 등)'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분명한 것은 인류는 AI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대(大) 전환기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9월 8일 국가AI전략위원회를 출범, 세계 'AI 3강'을 향한 구체적인 정책 수립에 돌입했다. 내년도 AI 관련 예산은 올해 3배인 10조1000억원 규모에 달한다. 새 정부 AI 정책 방향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평가를 들어봤다.
① 원팀(One Team)...정부 조직 개편 가속화
이재명 정부의 AI 정책에서 기대되는 대목은 '일하는 방식'의 변화다. 대통령 직속 국가AI전략위원회는 단순 자문 기구를 넘어 실질적인 전략 수립과 부처 업무 조정 권한을 갖는 조직으로 출범했다.
임문영 국가AI전략위원회 상근 부위원장은 9월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AI G3 신기술 전략 조찬 포럼'에서 "대통령과 사진 찍고 1년에 한두 번 자문하는 위원회로는 안 된다"며 "이번 위원회는 부처 간 칸막이부터 허물어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게 연결된 AI 시대엔 정해진 길이 없는 '무빙 타깃(움직이는 목표)'을 겨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AI전략위원회는 공공 데이터 개방이나 보안 등 부처 간 첨예하게 견해가 엇갈릴 경우 위원회 의결을 통해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원팀' 전략에 따라 국가AI전략위원회 산하 정부 AI책임관 협의회도 만들어졌다. 협의회 의장이자 국가 최고인공지능책임관(CAIO)은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이 맡았다. 각 부처마다 차관급 또는 실장급이 AI 책임관이 돼 협의회에서 부처 간 협업과 범정부 차원의 정책 집행을 뒷받침할 계획이다.
또 정부는 정부 조직 개편을 통해 과기정통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승격한다. 범정부 차원에서 AI와 첨단 기술 정책에 무게를 실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과학기술 부총리 부활은 약 17년 만의 변화다.
② GPU 20만장…“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정부는 5년 내 GPU 20만장을 확보해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은 "오픈AI의 챗GPT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언제나 대체재가 있어야 한다"면서 "독자 AI 파운데이션(기반) 모델을 만들어 이를 전 세계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소스로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다. 현재 시장을 주도하는 트랜스포머 아키텍처에 기반한 AI 모델은 엄청난 연산을 바탕으로 답을 도출한다. GPU가 많으면 AI 모델의 성능도 좋아지는 '스케일 법칙(규모의 법칙)'이 작용한다.
류제명 과기정통부 제2차관은 "AI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한 GPU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GPU 5만장을 조기에 확보하고 2030년까지 민관 협력을 통해 한국 내 GPU 수량을 20만장까지 늘리겠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GPU 보유량은 약 2만장으로 추산된다. 미국의 메타와 xAI는 각각 35만장, 20만장 이상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추론용(reasoning) 서비스가 본격화되면 GPU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
③ 피지컬 AI…중국과의 한판 승부
내년부터 전북과 경남에 각각 1조원 규모의 피지컬 AI(Physical AI) 국책 사업이 진행된다.이에 따라 중국과의 피지컬AI 주도권 경쟁도 불가피하다. 피지컬AI는 제조·로봇·자율주행 등 물리 세계와 결합된 AI 기술이다.
경남은 정밀 제어·예지 정비(고장·이상 징후 사전 감지) 등 제조 분야에 범용으로 투입할 수 있는 AI 모델을 개발한다. 전북은 상용차·농기계·건설기계 등 지역 주력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과 디지털 전환을 추진할 협업지능 플랫폼을 연구하고 실증할 계획이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AI 팩토리 추진 계획 등을 논의하기 위해 'AI 대전환 릴레이 현장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④ AI 기본 사회…“모두를 위한 AI”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시절 기본소득 정책을 적극 추진해 왔다. AI 시대엔 일자리 감소와 소득 불평등 심화 등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 이를 'AI 기본사회'라는 정책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9월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총회에서 "'모두를 위한 AI' 비전이 국제사회 '뉴노멀'로 자리 잡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10월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APEC AI 이니셔티브'를 통해 미래 비전을 공유하겠다"며 한국이 글로벌 AI 윤리 및 규범 형성에도 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내년 AI 예산 중 2조6000억원이 산업·생활·공공 분야에 AI를 도입하는 AI 전환(AX) 프로젝트에 투입한다. 특히 저출생·고령화 대응, 기후 위기 등 여러 구조적 문제를 AI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최근 국가AI전략위원회는 교육·보안·지역 3개 분야에 걸친 태스크포스(TF)도 추가했다. 초·중등 및 전 국민 AI 소양 교육, AI 악용 보안 문제에 대한 현안 대응, 지역 기반 AI 사업·정책 등을 논의한다.
⑤ 해외 파트너십…“빅테크부터 자산운용사까지”
새 정부는 해외 기업의 전략적 투자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대통령의 AI 첫 행보는 지난 6월 울산에서 열린 SK그룹과 아마존웹서비스(AWS)의 AI 데이터센터 출범식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번 9월 방미 중엔 뉴욕에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회장)를 만나 수십조 원 규모 한국 투자 방안을 논의했다.
정부는 오픈AI가 한국지사를 설립하면서 카카오, SK텔레콤, 크래프톤, 야놀자, 카페24 등 국내 주요 기업과의 협력을 연이어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자립'과 '협력'을 병행하는 복합 전략으로 한국 AI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책 방향에 대해 다수 전문가들이 "GPU 확보는 시급한 사안"이라고 평가했다. AI 연구는 물론 다양한 기초 과학 연구에도 GPU가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피지컬AI 실증 사업에 대해선 "한국이 선도할 수 있는 분야이지만, 실효성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도전을 맞이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실험실 규모에서 작동했던 AI 솔루션이 대형 공장에서는 복잡도 증가로 각종 난관에 부딪혔던 게 AI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차세대 전력망이나 에너지 개발, 포스트 트랜스포머 아키텍처 등 파급력이 높은 원천 기술 연구에 예산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임문영 부위원장은 "책임도 막중하고 할 일도 많다"면서 "오는 11월까지 구체적인 AI 행동 계획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