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러 국가 공무원들이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한국이 거둔 독보적인 성과의 비결이 무엇인지 자주 묻습니다. 국회 속기록까지 살펴보니 1980년대 TDX(전전자교환기) 국산화, 1990년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최초 상용화 과정에서도 수많은 제약과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치열한 고민 끝에 이뤄진 정책 결정들이 IT 강국 대한민국을 만든 출발점이었습니다."

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이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 석호익)이 9월 18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개최한 '제93차 조찬 간담회' 에서 '새정부 AI 정책 방향'을 주제로 강연했다./류현정 기자

새 정부가 범정부 차원의 인공지능(AI) 전략 추진 체계를 본격 가동한 가운데,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이 18일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 석호익)의 '제93차 조찬 간담회' 강연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격월 열리는 동북아공동체ICT포럼 조찬 간담회에는 국내 IT 산업 리더뿐만 아니라 국가 정보통신 정책을 수립했던 원로들이 꾸준히 참석한다.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이날 간담회 자리에도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김창곤 전 정보통신부 차관, 서영길 전 TU미디어 사장, 강성주 전 우정사업본부장(세종대 초빙 교수), 장광수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안양대 총장) 등이 함께 했다.

'새정부 AI 정책 방향'을 주제로 강연한 류 차관이 과거 정책 결단의 순간들을 회고한 것은 오늘날 한국이 맞이한 여러 도전적인 상황 때문이다.

2024년 토터스 미디어에 따르면, 한국 AI 역량은 미국 역량 대비 32% 수준이다. 중국 역량도 위협적이다. 미국 폴슨연구소 산하 싱크탱크 매크로폴로의 '글로벌 AI 인재 트래커 (Global AI Talent Tracker 2.0)'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AI 분야의 세계 상위 연구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국가가 되었다(2019년 19%→ 2022년 47%).

이날 강연에서 류 차관은 새 정부의 기술 주권 확보 의지와 실용 중심 전략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해외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기술 주권을 확보하고 산업·공공·지역 전반의 AX(인공지능 대전환)을 통해 국민이 삶의 질 향상을 체감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새 정부의 AI 정책 방향을 류 차관의 발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AI 3대 강국...한국 AI 잠재력 충분”

이재명 정부는 5년간 역점 추진할 123개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대통령 4년 연임 개헌,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등과 함께 'AI 3대 강국'이 핵심 과제로 포함됐다.

류 차관은 "현재 우리나라는 싱가포르,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3위권 그룹에 있지만, 미·중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3위이다. AI 2강과 비등한 수준의 3강으로 올라서야 한다"고 말했다.

류 차관은 "무엇보다 AI는 국방, 안보, 외교 등 전방위로 영향을 미친다"면서 "국가 생존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핵심 기술에 대한 자율권과 통제권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한국의 AI 역량 잠재력이 크다고 판단한다. 최근 5년 간(2020~2024)년 기준 머신 러닝(기계 학습) 세계 톱 25 연구자에 황성주 교수(11위), 신진우교수(15위) 등이 올랐다.

지난 7월에는 LG AI리서치의 '엑사원 4.0'(11위), 업스테이지의 '솔라프로2'(14위) 등이 세계 최상위권 LLM(Large Language Model)에 랭크됐다.

다만, 류 차관은 "한국의 자체적인 AI 생태계 육성을 지원하는 것이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을 배제하거나 글로벌 기업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최근 오픈AI가 한국 사무소를 열고 국내 기업과 협업을 확대하고 있는 데, 다양한 트랙으로 국내 AI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국립과천과학관 미래상상SF관에 설치된 반도체 산업 설명 영상에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 메모리(HBM) 구조 등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5년 안에 GPU 20만장 확보”

현재 트랜스포머 아키텍처에 기반한 AI 모델은 엄청난 연산을 바탕으로 답을 도출한다. GPU가 많으면 성능도 좋아지는 '스케일 법칙'이 작용한다.

류 차관은 "AI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한 GPU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서 "국가 재정을 투입해서 5년 내 20만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민간이 2000억원을 출자하고 특수목적법인(SPC) 지분을 49% 보유하는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도 재추진 중이다. 정부도 두 차례 사업 유찰 후 조건을 조정하고 있어 삼성SDS 등의 참여가 유력시 되고 있다.

류 차관은 "중국차이나텔레콤이 1만장 GPU를 확보하자 과잉 투자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지난 1월 '딥시크 쇼크' 이후 중국 스타트업과 연구진 사이에서 GPU 수요가 폭증해 거의 소진했다"면서 "앞으로 추론용 서비스가 본격화되면 GPU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한국의 GPU 보유량은 약 2만장으로 추산된다. 미국 메타와 xAI는 각각 35만장, 20만장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중 경쟁 치열...제3의 기회 공간 주목”

사실 GPU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미·중 전략적 경쟁에 따른 외교적 부담도 상당한 편이다. 미국은 지난 7월 AI 액션 플랜을 발표하고 주요 국가에 AI 모델과 솔루션,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국산을 쓰라는 'AI 풀스택' 전략을 펼치고 있다.

2025년 9월 10일(현지시간) 미국 양당 상원의원들이 워싱턴 DC 연방의사당에서 열린 상원 상무위원회 산하 과학·제조·경쟁력 소위원회 'AI 경쟁 우위 확보: 미국의 행동 계획' 청문회에 참석해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 AFP

류 차관은 "지난 8월 4일 인천 송도에서 처음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디지털·AI 장관회의에 마이클 크라치오스 미국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이 참석해 주목을 끌었다"며 "그는 미국의 AI 풀스택 활용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고 있다고 강조했고, 우리에게도 여러 정책적 시사점을 던졌다"고 말했다.

류 차관은 중국이 AI 정책을 한층 고도화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중국의 'AI플러스(AI+) 행동계획 심화 시행 지침'은 6대 AI 응용(과학·산업·소비·민생·사회·글로벌 등) 추진, 8대 기초역량(모델·데이터·컴퓨팅·오픈소스·인재·안전 등) 확보 전략을 상세히 담고 있다.

다만, 류 차관은 "제3의 외교적 기회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UAE, 사우디아라비아, 동남아 일부 국가들은 미국, 중국 어느 한쪽에 의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기업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 체감형 AX 대전환 아이디어 달라”

곡성군 관계자들이 고독사 예방을 위한 1인가구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있다./곡성군

류 차관은 "AI 역량을 키워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삶의 질 향상을 이뤄내는 AX(인공지능 대전환)에 국가 AI 정책의 마지막 방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고독사 방지 등 저출생·고령화, 기후 위기 등 한국 사회가 마주하는 구조적 문제를 타파하고 의료·복지·교육 등 실질적인 효능을 만들어내는 것이 'AI 3대 강국' 타이틀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류 차관은 "내년도 AI 예산은 올해 대비 약 3배인 10조원인데, 대부분 국민의 질 향상과 관련돼 있다"면서 "각 분야에서 AX 대전환을 통해 성과가 나오도록 정말 많은 아이디어를 달라"고 당부했다.

강연 후 다양한 청중 질의가 나왔다.

IT협회 한 관계자는 "그동안 한국은 애플리케이션을 발빠르게 개발해 IT 강국이 될 수 있었는데, AI 시대에도 버티컬 AI, 에이전틱 AI 등 특화 서비스 개발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류 차관은 "각종 특화 서비스도 '기반 모델(foundation model)'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다"면서 "'라마(LLaMA)' 등 오픈 소스도 갑자기 폐쇄될 수 있다는 점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우위를 가지려면 제조 강국인 한국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피지컬 AI 전략을 펼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청중 의견도 있었다.

류 차관은 "실제로 우리 정부는 세계 AI 기술을 이끌수 있는 초격차 AI 선도 기술 확보 전략 중 하나로 '피지컬AI'를 꼽고 있다"면서 "전주, 창원을 중심으로 1조원 이상의 예산 투자가 확정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부는 'AI G3' 도약을 위한 조직개편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8일 출범한 '국가AI전략위원회'는 10개 부처 장관과 34명의 민간위원이 참여한 가운데 분과위원회 구성까지 마쳤다.

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부총리급 부처로 격상되는 정부조직법도 추진 중이다. 국가AI전략위 지원단장은 부처 실장급(1급) 인사가 맡게 된다. 부처 내 AI정책실이 신설돼 총괄·조정 업무를 맡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