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칩 선두 주자 엔비디아가 미·중 기술 패권 전쟁으로 또다시 '등 터질' 위기에 내몰렸다. 미국발 수출 제재로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중국에서 사업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중국 정부로부터 최대 2조원에 달하는 반독점 벌금 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엔비디아가 미·중 양국의 싸움에 옴짝달싹 못 하는 사이, 화웨이를 필두로 한 중국 토종 기업들은 재빨리 그 틈을 파고들고 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를 향한 중국의 반독점 조사가 거액의 벌금 부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조사는 엔비디아가 2019년 이스라엘 반도체 회사 멜라녹스를 인수할 당시 중국 정부가 승인 조건으로 제시한 조항 이행 여부를 정조준하고 있다. 당시 엔비디아는 중국 정부의 인수 승인 대가로, 6년간 중국 시장에 GPU(그래픽처리장치) 가속기 등을 차질 없이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엔비디아가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통제를 이유로 일부 GPU 가속기 공급을 중단하자, 중국은 이를 약속 위반으로 보고 작년 12월 반독점 조사를 개시했다. 지난 15일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SAMR)은 "예비 조사 결과, 엔비디아의 조건 위반 혐의가 드러났다"며 "법에 따라 추가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법 규정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과징금은 2조원대에 이를 수 있다. 중국 반독점법은 기업이 인수합병 조건을 위반하면 직전 회계연도 중국 내 매출의 최대 10%까지 과징금을 물릴 수 있도록 규정하는데, 엔비디아의 지난 회계연도 중국·홍콩 매출(171억달러)을 단순 적용하면 상한은 17억달러(약 2조3500억원)다. 다만 업계는 앞서 미국 기업에 적용된 전례에 더 주목한다. 미국 반도체 회사 퀄컴은 2015년 반독점법 위반으로 전년도 중국 매출의 8%에 해당하는 약 9억7500만달러(약 1조3500억원)를 벌금으로 냈다. 이는 외국 기업에 내려진 최대 규모 제재로 꼽힌다. 이 기준을 엔비디아에 단순 적용하면 14억달러(약 1조9000억원) 수준이다.
엔비디아는 이번 조사와 관련해 "우리는 각국의 법규를 준수하고 있으며, 모든 규제 당국과 협력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잇따른 제재에도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중국 사업 현실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지난 2분기(5~7월) 중국용 AI 칩 'H20' 매출은 사실상 전무했고, 3분기 실적 예상치에도 중국 매출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엔비디아가 최근 중국 시장에 출하한 저사양 칩 'RTX 6000D'는 중국 당국이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등 자국 빅테크 기업들에 구매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H20 대체 칩인 'B30A' 역시 미·중 양국의 규제 심사를 모두 넘어야 해 전망은 불투명하다.
중국 정부는 엔비디아를 압박하는 동시에 자국산 대체제를 키우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공공 데이터센터에서 사용하는 컴퓨팅 칩의 절반 이상을 중국산으로 대체하도록 의무화했고, 베이징·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는 2027년까지 데이터센터 국산 칩 채택률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같은 정책 지원에 힘입어 중국 토종 반도체 기업들도 발 빠르게 AI 칩을 내놓고 있다. 중국 대표 빅테크 화웨이의 '어센드' 칩은 엔비디아 이전 세대 제품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웨이는 단일 칩 성능의 한계를 여러 칩을 묶는 '클러스터링' 방식으로 극복하며 시스템 전체 성능을 끌어올리고 있다. AI 반도체 설계 기업 캠브리콘은 엔비디아 A100을 겨냥한 대체 제품을 출시해 올 상반기 매출이 44배 급증했고, 창사 이후 처음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의 거대 인터넷 기업들도 칩 자립에 뛰어들고 있다. 바이두는 자체 개발한 '쿤룬' 칩을 자율주행과 클라우드 서비스에 적용하고 있으며, 알리바바도 반도체 설계 자회사 '핑터우거(T-head)'에서 만든 자체 AI 칩으로 중국 2위 이동통신사 차이나 유니콤을 고객사로 확보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여기에 바이런테크 등 AI 스타트업들도 가세해 시장 저변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