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치열해진 가전 산업에 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상상력의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소비자 삶에 필요한 AI 기능을 누가 더 빠르게 고민하고 먼저 도입하느냐가 승부의 열쇠가 될 것이다.”(브라이언 코미스키 미 소비자기술협회(CTA) 시니어 디렉터 겸 미래학자)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 2025’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7일(현지시각) 막을 올렸다. CES는 전 세계 혁신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첨단 기술을 선보이는 경연장이다. 올해 CES의 주제는 한층 더 발전된 AI 기술로 전 세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다이브 인(DIVE IN·몰두하다)’으로, 핵심 키워드 역시 전 산업에 적용된 AI다.
해마다 구름 인파가 몰리는 한국, 중국, 일본 전자 기업들은 CES 2025에서 AI 가전 경쟁을 펼친다. 한국에선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중국에선 TCL과 하이센스가, 일본에선 소니와 파나소닉이 대표 주자다.
◇ 삼성·LG, AI 가전이 사용자 말·행동까지 분석
삼성전자와 LG전자는 AI로 모든 가전이 연결되는 ‘AI 홈’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꼽았다. 가전 시장이 침체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사용자의 일상 속 말과 행동을 분석하는 맞춤형 AI 서비스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모든 가전제품에 AI 칩을 탑재하겠다고 공언해 온 삼성전자는 AI 가전이 가족 구성원의 일상을 돌본다는 점을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공간 AI 기반의 ‘스마트싱스 앰비언트 센싱’ 기능은 수면 등 사용자의 활동 상태를 자동으로 파악해 에어컨의 바람 세기나 TV 음량 같은 주변 가전 기능을 제어한다. LG전자도 AI 가전에 달린 센서로 사용자의 심박수와 호흡, 기침 등을 분석해 집안 환경을 알아서 조절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AI 홈 경쟁은 TV에서도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개인 맞춤형 AI 기술을 탑재한 TV 신제품을 이번 CES에서 공개해 혁신상을 받았다. 이 제품에 처음 적용된 ‘비전 AI 컴패니언(동반자)’ 기술은 사용자가 ‘서울 주변 여행지’와 같은 관심사를 말하면 AI가 이를 분석해 맛집 지도와 일정 등을 TV 화면에 보기 쉽게 나열해 준다. LG전자는 AI 맞춤형 검색 기능을 강화한 TV 신제품 LG 올레드 에보를 내놔 이번 CES에서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 中 하이센스·TCL도 ‘AI 홈’ 경쟁 가세
하이센스와 TCL 역시 AI 기반으로 구축된 ‘스마트 홈 생태계’를 내세운다. 프리미엄 TV 시장에서도 세계 1위 삼성전자를 위협하는 중국 가전 기업들은 TV뿐만 아니라 냉장고, 에어컨 등 다양한 제품에 AI 기술을 접목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하이센스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AI 기술을 공동 개발해 ‘스마트 키친’에 적용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재료를 분석해 가족 구성원 식습관에 최적화된 레시피를 제공하며, 개인별 선호를 반영한 식단도 계획해 준다. TCL은 자체 AI 플랫폼으로 가전제품을 연결하고, AI가 주변 환경을 분석해 집안 온도 등 환경을 제어하는 스마트 홈을 선보인다. 스마트 홈 보안을 위해 열쇠나 비밀번호 대신 손바닥 정맥을 AI가 인식해 문을 열어주는 잠금장치도 내놓는다. 또 TCL은 6일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업계 첫 모듈형 AI 컴패니언(동반자) 로봇 ‘에이미(AI me)’를 공개하며 “언젠가 모든 가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신 AI 기술을 통합한 이 로봇은 바퀴가 달린 이동형 플랫폼과 로봇 본체를 분리할 수 있다.
100인치 이상 초대형 TV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하이센스는 이번 전시회에서도 AI 프로세서를 적용한 136인치 마이크로 LED TV와 116인치 트라이크로마 LED TV를 선보일 예정이다. TCL도 초대형 AI TV를 잇달아 내놓는다. 지난해 CES에서 세계 최대 크기인 115인치 퀀텀닷 미니 LED TV를 공개했던 TCL은 올해에도 초대형 퀀텀닷 미니 LED TV를 출품한다.
◇ 日, 가전 벗어나 B2B 사업으로 진화
한때 세계 가전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 기업들은 이제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에서 벗어나 B2B(기업 간 거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소니는 과거 브라비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등 자체 TV 브랜드를 CES 전면에 내세웠던 것과 달리, 올해는 AI 기반 엔터테인먼트 제품과 인포테인먼트 기술에 초점을 맞췄다. 올해 CES 최고 혁신상을 받은 소니의 제품도 확장현실(XR) 기기와 무선 AI 오디오 시스템이다. 또한 혼다와의 합작법인에서 소니의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내장한 전기차 ‘아필라’의 상용화 버전도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다.
파나소닉도 가전 제품 대신 AI 산업 솔루션과 인프라 사업에 집중했다. 유키 쿠수미 파나소닉 최고경영자(CEO)는 CES 2025 기조연설에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WELL into the Future)’라는 주제로 친환경 에너지 기술과 첨단 솔루션을 소개할 예정이다. 게리 샤피로 CTA CEO는 “파나소닉은 소비자 제품에서 B2B 사업으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CES도 점차 B2B 중심의 전시회로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 기업의 변신은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고 있다. B2B 기업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LG전자의 조주완 사장은 작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4′에서 소니를 롤모델로 꼽기도 했다. 그는 “TV, 모바일 기기 사업을 하던 소니는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SW)와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방향을 틀어 성공적으로 턴어라운드했다”며 “LG전자도 단순히 TV 제조사에 머물지 않고 TV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