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장비 기업의 올 2분기(4~6월)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큰 폭으로 성장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이 중국에 첨단 반도체 산업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자립화에 나선 중국 반도체 제조 기업을 중심으로 수요가 확대된 영향이다. 미국의 제재에 반도체 제조 및 설계뿐만 아니라 장비 산업에도 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투자를 지속하며 기술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6일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중국의 웨이퍼 가공과 조립, 패키징 및 테스트용 반도체 제조 장비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62% 증가한 120억달러(약 16조200억원)를 기록했다. SEMI는 “중국이 미국의 제재가 지속되는 가운데, 기술 자립을 위해 노력하면서 올 2분기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르게 성장하는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산업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자국 반도체 장비사들의 수출 제재뿐 아니라 동맹국에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동맹국 기업에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적용해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FDPR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장비·기술 등을 조금이라도 사용했으면, 수출 시 미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한 규칙이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수입이 가로막힌 데 이어 최근에는 심자외선(DUV) 장비 관련 서비스를 중국 기업에 제공하는 것도 중단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의 제재에 기술 자립에 나선 중국 반도체 제조 기업이 자국 장비를 대거 주문하며 반도체 장비 기업의 실적도 크게 개선되고 있다. 중국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중국 시장 1위 반도체 장비 기업인 베이팡화창(나우라 테크놀로지)의 2분기 순이익은 27억8100만위안(약 524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4.5% 증가했다. 나우라 테크놀로지는 반도체 식각, 세척을 비롯한 10여개 반도체 장비와 인공지능(AI) 가속기 핵심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에 사용하는 실리콘관통전극(TSV) 장비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기간 반도체 패키징, 테스트용 장비를 생산하는 창촨테크의 순이익은 2억1500만위안(약 405억원)을 기록, 전년 대비 949.3% 늘었다.
중국 반도체 제조 기업의 대대적인 연구개발(R&D) 투자가 지속되고 있어, 반도체 장비 시장도 이와 맞물려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화웨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SMIC를 중심으로 첨단 공정 R&D가 진행 중이고,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이 HBM 개발에 착수했다. 중국 카이위안증권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 장비 시장 규모는 2023년 366억달러(약 49조원)에서 2027년 657억7000만달러(약 88조원)로 연평균 15.8%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에 외산 반도체 장비를 대량 구매하는 것과 동시에, 장비 국산화에도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지난 2019년 2041억위안(약 38조170억원) 규모의 ‘빅펀드 2기’를 설립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회사에 자금을 투자해 온 중국은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규모인 3440억위안(약 64조3300억원) 규모의 3기 빅펀드를 출범했다.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국내 반도체 장비업계 고위 관계자는 “EUV 노광 장비와 같은 첨단 장비를 하루아침에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중국의 장비 기술 발전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며 “미국의 제재가 중국 반도체 장비 산업 기술 내재화의 강력한 동기를 마련해준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