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글로벌 반도체 강국에 비해 뒤처진 반도체 설계(팹리스) 분야에서 인공지능(AI)이 촉발한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의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는 업계 제언이 나왔다. 메모리반도체 강국인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글로벌 점유율은 3.3%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엔비디아, 애플 등이 주도하는 팹리스 시장의 한국 점유율은 1% 수준이다. 메모리 시장보다 2배 이상 큰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모색하려면 현재 파편화된 정책 지원이 대폭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국내 팹리스 경쟁력 강화 및 산업 활성화’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국회의원 연구단체인 지속 가능 성장을 위한 구조개혁 실천 포럼 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엔 김녹원 딥엑스 대표, 박재홍 보스반도체 대표, 페르소나AI 유승재 대표, 김경수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 겸 넥스트칩 대표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이 좌장을, 이혁재 서울대 시스템반도체 산업진흥센터장이 발제를 맡았다. 고 의원은 “한국이 잘하지 못해온 파운드리 산업에서 도약하기 위해서는 팹리스의 생태계 동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미국과 일본, 유럽, 중국 정부가 반도체 기업 투자액의 절반가량을 지원하는 것처럼 한국도 세제 지원뿐 아니라 직접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팹리스 산업계 대표들은 경쟁국 수준에 준하는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동차 반도체 전문기업 보스반도체의 박 대표는 “전기전자, 우주항공, 방산 등 시스템반도체는 모든 산업에 들어가, 한국이 주도권을 되찾아 오지 못한다면 외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며 “중국은 정부 차원에 자국 팹리스 제품을 쓰는 업체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등 시스템반도체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반면 현재 정부의 R&D(연구개발) 지원은 부처 간 파편화돼 있고 기술력이 있지만 업력이 짧은 신규 스타트업에는 상당히 불리한 구조로 짜여 있다”며 “팹리스 업체들이 반도체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백억원이 드는데, 중국이 현지 팹리스 기업이 자국 팹(공장)을 사용하면 정부가 개발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수 협회장도 “팹리스 기업은 R&D 지원 사업이 절실하다”며 “3~5년간 칩 하나를 만들어 이익을 낼 때까지 현재는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없는데, 스타트업은 당장 눈앞의 몇 년이 더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초기 지원 사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정부의 팹리스 산업 지원은 ‘톱다운’ 방식으로, 반도체 개발에 3~5년이 걸리는데 이미 정해진 스펙(사양)으로 정부 과제를 수행하면 나중에 쓸모없는 스펙이 되는 경우도 많다”며 “큰 방향성은 정부에서 정하더라도 기업별, 산업별로 차별화된 기술의 스펙을 ‘바텀업’ 방식으로 올려 과제를 평가받고 지원 기업을 선정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 제재와 관련해 중국 사업에서 정책적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온디바이스(기기 탑재) AI 반도체 스타트업 딥엑스의 김 대표는 “현재 중국 기업 텐센트, 바이두 등과 사업 협업을 하고 있는데, 미국의 중국 첨단 반도체 산업 제재로 사업 환경이 불안정한 상황”이라며 “중국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는데, 사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원스톱 헬프 데스크 같은 사업 가이드 지원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정부의 집중 지원이 생태계 조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그간 한국 기업들은 정부 주도의 R&D 과제를 통해 원천 기술 등의 개발을 잘 해왔던 역사가 있다”며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에도 정부 주도의 R&D 지원이 있다면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 협회장은 “한국은 시스템반도체 인력을 비롯한 기초 체력이 약한 상황이기 때문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클러스터 조성이 필요하다”며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말이 나온 지 5년이 지났는데 실제로는 진행이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