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직 사퇴를 발표한 날 대만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가 일제히 하락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가 반도체 산업에 끼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시장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미국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받고 시설투자를 추진 중인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향후 리스크에 대한 대비에 나서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 바이든 사퇴에 대만 증시 휘청… “불확실성 커져”
23일 대만 언론 등에 따르면 바이든이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직 사퇴를 발표한 당일(22일) 대만증권거래소 타이익스(TAIEX) 지수는 하루 동안 3% 이상 하락했다. TSMC와 미디어텍, 롄화전자(UMC), ASE 등 대만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가 내린 영향이다.
지난주 트럼프는 대만 반도체 생태계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반도체 산업의 거의 100%를 (대만이) 가져갔다”면서 “미국은 보험회사와 다를 바 없다. 대만은 미국에 방위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보조금 정책에 대해 “대만이 새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하기 위해 미국은 대만에 수십억 달러를 주고 있다”며 비난했다.
강경한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책 변화가 예고되자 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시장에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중국 하이통증권의 제프 푸 연구원 발언을 인용해 대만 증시의 하락이 “바이든이 대선 출마를 철회한 것과 지정학적 불확실성에 대한 투자자의 우려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 韓 기업 영향 받을 것… “트럼프 당선 대비해야”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트럼프 당선 시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받고 대대적인 시설투자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대한 반도체 투자 규모를 기존 170억달러(약 23조원)에서 440억달러로 확대했다. SK하이닉스도 38억7000만달러(5조20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인디애나주에 인공지능(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공장에서 오는 2028년 하반기부터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할 방침이다.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은행(IB)인 모건스탠리는 TSMC, 미디어텍과 함께 SK하이닉스의 주가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모건스탠리는 엔비디아가 주도하고 있는 AI 반도체 수요 확대에 따른 수혜주로 SK하이닉스를 포함시키며 주가가 30% 이상 상승할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놨다. 하지만 미국 대선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정책 등에 비판적인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를 재조정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도 큰 틀에서 보면 ‘자국 우선주의’이지만, 최소한 동맹국과 협력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보조금이라는 혜택을 제공하면서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을 택했다”며 “트럼프의 경우 보조금을 축소하거나, 중국과 거래하는 기업에 페널티를 부여하는 형태로 자국에 이익이 되도록 국내 반도체 기업들을 강하게 압박할 가능성이 높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유회준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수조원을 투자해 가며 생산기지를 지을 이유가 없었다”면서 “그동안 정치적인 압력 등이 작용해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향후 미국 정부의 움직임을 살피며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서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