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미세공정의 핵심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이 반도체 시장이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으며 반등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ASML은 내년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고, 회사 설립 이래 처음으로 자체 재고를 올해부터 구축해 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ASML은 14일(현지시각) 내놓은 연례 보고서에서 "시장이 침체의 최저점에 다다랐으며, 앞으로의 반등 속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회복이 시작되고 있다"면서 "시장의 장기적인 트렌드인 인공지능(AI), 전기화, 에너지 전환 등은 현재 진행형으로, 향후 몇 년간 여러 팹(반도체 공장)이 새로 문을 연다는 점이 이런 명백한 흐름을 뒷받침한다"고 했다.
ASML은 내년부터 회사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일찌감치 내년 물량을 준비한다는 전략을 내놨다. 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보고서에서 "내년에는 시장 반등으로 회사도 강력하게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올해는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내년 수요 급증을 대비, 우리만의 재고를 사전에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2025~2026년 회사가 목표로 하는 생산 능력은 심자외선(DUV) 장비 600개, EUV 장비 90개로 제시했다.
내년을 준비하는 올해의 경우 '전환의 해'로 정의하고, 지난해와 유사한 수준의 수익을 낼 것으로 ASML은 내다봤다. 지난해 ASML 매출은 전년보다 30% 증가한 276억유로(약 39조4800억원), 순이익은 전년보다 39% 늘어난 78억4000만유로(약 11조2100억원)를 기록했다. ASML의 첨단 반도체 장비 수요는 반도체 업계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지표 역할을 한다. ASML은 "지난해 회사의 EUV 사업은 시장 환경에 따른 주문 지연과 첨단 팹 건설 인력 부족 등으로 수요에 변화가 있었고, DUV 사업은 중국에서 회사가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초과 수요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각국 정부가 반도체 제조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칩 제조업체들은 미국, 유럽, 아시아에 제조 시설을 짓도록 자극받고 있다"며 "업계 전망에 따르면 세계 3대 반도체 제조업체가 다가오는 몇 년간 생산 및 연구개발 관련 설비투자에 3000억달러(약 400조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며, 모든 새로운 팹에는 ASML의 장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지난해 ASML 매출의 24.5%를 차지했다. 국가별 매출 1위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TSMC가 있는 대만(29.3%)으로 집계됐다. ASML은 기업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으나, 회사의 대표적인 큰 손 고객은 TSMC와 삼성전자, 인텔이다. 중국(26.3%)은 지난해 반짝 한국을 제치고 ASML의 두번째로 큰 시장이 됐다. 미국의 대중(對中) 첨단 반도체 제재로 고성능 DUV 노광장비 수출길이 막히기 전, 중국 기업들이 장비 사재기에 나선 영향이다. ASML 측은 "중국 고객으로부터 상당한 주문을 받았지만 주문 충족률은 50% 미만이었다"며 "(중국 이외) 고객들이 주문 속도를 줄이는 상황에서 중국 수요가 이를 상쇄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ASML은 미국발 중국 수출 규제와 경쟁 장비업체의 부상을 사업 위협 요인으로 꼽았다. 지난해 4분기만 놓고 보면 중국 시장은 ASML 매출의 39%를 차지했으나, 올 1분기에는 중국 매출 비중이 8%로 쪼그라들 전망이다. 이에 따라 올해 ASML의 중국 수출용 중저가 DUV 장비 매출은 약 10~15% 감소할 것으로 회사는 내다봤다.
DUV 분야 경쟁사인 전통적인 광학 기술 강자 일본 캐논과 니콘을 비롯해 미 장비업체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KLA 등 경쟁사들의 움직임도 거세다. 최근 캐논은 15년 이상 개발해 온 저가형 신기술 '나노임프린트 리소그래피'를 내세워 ASML EUV에 도전장을 냈다. ASML은 "상당한 재정 자원을 갖춘 새로운 경쟁자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맥락에서 자급자족을 이뤄내려는 경쟁자들과도 직면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