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은 무릎’이라는 말에 걸맞게 이번에 출시된 ‘철권8′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나이 때문에 은퇴를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40대에도 프로게이머를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수 게이머가 되고 싶습니다.”
DRX 소속 철권 프로게이머 배재민(38) 선수는 본명보다도 닉네임 ‘무릎(Knee)’으로 유명하다. 선수생활 20년 동안 세계 최대 격투게임 대회 에보(EVO·Evolution Championship Series) 3회 우승, 국내외 철권 대회 총 119회 우승, 37회 준우승 등의 기록을 남겼다. ‘철권의 신(Tekken God)’이라는 수식어가 배 선수 이름 앞에 따라붙었다. ‘철권은 무릎’ ‘니(Knee)가 무릎이가’ 같은 밈(meme) 역시 배 선수의 인기를 방증한다.
배 선수는 ‘도발제트 어퍼’라는 기술을 만들어내 유명해졌다. 철권 개발자들도 몰랐던 기술이라고 한다. ‘브라이언 퓨리’라는 캐릭터로 게임할 때 도발로 상대의 방어를 깬 뒤 제트어퍼(띄우기)로 확정타를 만드는 기술이다. 배 선수가 이 기술을 만들어낸 뒤 철권 개발사인 일본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가 이를 공식 기술로 인정했다.
철권은 게임 원산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게임이다. 그런데 2017년 출시된 철권7에 아랍 모티브 캐릭터가 등장하며 중동 및 파키스탄 지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배 선수의 인지도도 해당 지역에서 덩달아 높아졌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수도 아부다비에서 열리는 중동 지역 최대 대중문화 축제 ‘2024 MEFCC(Middle East Film&Comic Con)’에 배 선수를 초청했다. 그는 부대행사로 오는 10일 열리는 ‘철권8 쇼다운 임팩트’에서 라이벌로 꼽히는 파키스탄 출신 ‘아슬란 애쉬(닉네임)’ 아슬란 시디크 선수와 맞붙는다. 정식 토너먼트 대회는 아니지만 지난달 7년 만에 출시된 철권8로 치러지는 첫 경기다.
아슬란과의 대전을 앞둔 배 선수를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DRX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이번 행사는 철권8 출시를 알리는 쇼매치이기 때문에 (아슬란 선수와 맞붙는 것에 대해) 특별히 준비를 하거나 긴장하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4월 에보 재팬을 시작으로 올해 공식 대회들이 줄줄이 열리는데 이런 대회에서 아슬란 선수는 반드시 잡아야 할 강력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슬란은 공격과 반응의 밸런스가 좋고 침착함이 강점인 선수”라며 “긴박한 순간에 실수하지 않고 역전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배 선수는 철권계의 신흥 강국으로 파키스탄을 꼽았다. 그는 지난 2019년 반다이남코 주최로 열린 국제 토너먼트대회 ‘철권 월드 투어(TWT·Tekken World Tour)’ 그랜드 파이널을 열흘 앞두고 파키스탄에 혈혈단신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파키스탄 선수들의 노하우를 흡수하고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배 선수가 파키스탄 북동부에 있는 라호르(Lahore) 지역에 3일간 머무르며 아슬란을 포함해 41명의 선수들과 대결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그는 “철권은 혼자하는 것보다 모여서 해야 효과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했다. 사람끼리 맞붙어야 서로의 기술과 공략 방식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 선수는 “오락실에 모여 철권 게임을 하는 것은 1990년대 한국 오락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오락실이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개인방송을 하지 않느냐”며 “파키스탄에 가보니 한국의 1990년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철권 시리즈가 처음 출시된 것은 1994년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배 선수는 오락실을 오가다 처음으로 철권을 접했다고 한다. 그는 “다른 격투 게임도 해봤지만, 철권에 ‘쿠마’라는 곰 캐릭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매력을 느꼈다. 사람과 동물 캐릭터가 맞붙을 수 있도록 한 게 신기했다”면서 “스트리트파이터보다 호흡이 빠른 점도 재미있었다”고 했다. 또 “상대방을 이기려고 열심히 전략을 짜는 과정에서 ‘내가 승부욕이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기도 했다”면서 “게임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PC 게임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됐을 때에도 배 선수는 철권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생 때 경북 경산시에 살았는데 철권으로는 ‘무릎’이 제일 잘 한다고 소문이 났다”며 “철권을 즐기는 대구의 ‘고수’ 분들이 제가 사는 곳까지 찾아왔는데 이 분들한테 그날 하루 동안 30연패를 했다.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배 선수는 “대구에서는 오락실에 서로 모여서 각자 기술과 공략법을 나누는 문화가 있었던 것”이라며 “그날 이후 주말마다 대구에 가서 게임을 했다. 다른 지역도 돌아다니며 고수들의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모여서 게임하는 사람들은 게임에 대한 정보나 지식량이 완전히 다르더라”고 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오락실처럼 모여 게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입문자들이 재미를 쉽게 느끼고, 선수들도 실력을 높일 수 있으며, 철권 프로게이머들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공간이 필수라는 것이다. 배 선수는 “이 꿈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며 “옛날에 열심히 배운 덕분에 지금도 버티고 있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배 선수는 “프로게이머가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을 때에는 ‘스타크래프트니까 가능하지 철권에선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면서 “실제 철권 프로게이머로서 구단의 지원을 받고 유니폼을 입고 활동을 시작한 건 2017년부터였는데, 지금은 게임이 거대 산업으로 발전해 프로게이머 뿐 아니라 유튜버, 감독 등 여러가지 길이 생겼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했다.
비주류 게임에 대한 관심도 당부했다. 배 선수는 “게임 산업이 성장하고 있고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주류 게임 한두 개에 국한된 이야기”라며 “기업이나 팀이 알아서 해결하기는 너무 어렵다. 국내 대회들의 종목도 지금보다 다양화되고, 학생들도 어릴 때부터 프로게이머라는 꿈을 키울수 있도록 여러가지 기회들이 생기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