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게임·K팝·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가 한류 재도약을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K-콘텐츠가 전 세계 문화와 트렌드를 주도하면서 팬덤 비즈니스 등 새로운 산업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K-콘텐츠의 인기 비결과 산업 전망, 시장 공략 전략 등을 살펴본다.[편집자주]
한국 웹툰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는 ‘목욕의 신’의 하일권 작가, ‘약한영웅’의 서패스(필명) 작가, ‘화이트블러드’의 임리나 작가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끄는 것은 물론이고 웹툰업계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세종대 출신이라는 점이다. 국내 최대 아마추어 신인 웹툰 작가 등용문으로 불리는 네이버웹툰 ‘지상최대 공모전’에서도 지난해 황예은 학생이 ‘미로 인 메모리’로 우수상을, 2022년 정자운 학생이 ‘소마소응’으로 대상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세종대가 배출한 예비 스타 웹툰 작가들이다.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테크학과는 1996년 신설됐다. 지금까지 5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와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업계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그린 이현세 작가도 이 학과의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학과장인 이순기 교수는 현업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직 웹툰 작가다. ‘모두 너였다’ ‘또 다른 사랑’ 등을 최근까지 연재했다. 이 교수는 “최근에는 해외 학생들을 정원 외로 선발하고 있는데 전체 학생 수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한국에 웹툰을 배우러 많이들 온다”라고 했다.
◇ “야옹이 ‘여신강림’ 보고 베트남에서 날아와”
지난달 1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세종대 군자관 412호에서는 만화애니메이션테크학과의 ‘디지털코믹스 제작’ 수업이 한창이었다. 이번 학기 과제는 학생들이 각자 웹툰을 기획하고 첫 화를 그리는 것이었는데, 이순기 교수가 학생들에게 1대1 피드백을 해주고 있었다. 이 교수는 이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옆 측면에서 광대뼈와 눈두덩이가 안 나오면 어색하다” “입이 있어야할 위치에 입을 안 그리고 공간을 남겨두면 레이아웃이 이상해진다”는 등의 작화 조언을 했다.
경영학과에서 전과를 했다는 문현빈씨는 “전과를 하려고 실기시험과 면접을 봤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이날 문씨에게 “보통 학생들은 기획과 스토리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획과 스토리를 잘한다”면서 “그림만 조금 더 연습하면 웹툰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너의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진로 조언을 해줬다.
외국인 학생도 여럿 눈에 띄었다. 베트남에서 날아온 보 티엔 짱(Vo Thien Trang) 학생은 “베트남에서 야옹이 작가의 ‘여신강림’을 보고 웹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열심히 검색해서 한국 대학의 시험을 봤고 세종대에 오게 됐다. 직접 내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중국에서 왔다는 마흐니 학생은 “‘해적왕’이라는 웹툰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면서 “비슷한 장르의 웹툰을 만들고 싶고 다음 학기를 목표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웹툰을 만들려면 한국어도 빨리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K-웹툰 태동기부터 함께 해온 세종대 애니메이션테크학과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1학년 때부터 웹툰에 대한 기초를 배운다. 2학년 때는 작화, 3~4학년때는 기획과 연출에 집중하는 등 체계적인 과정을 거친다. 졸업 작품으로 500컷 이상의 작품을 준비해야 한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벼락 스타’를 꿈꾸며 웹툰 작가를 준비하는 게 아니다”라며 “수업을 통해 자신들의 특장점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세종대는 지난 2020년 학과 내에 ‘세칸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웹툰 산업이 커지며 제작환경이 급변하자 학생들이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과정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세칸 스튜디오가 웹툰 제작사인 재담미디어와 협력해 만든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는가’ ‘신의 집사’는 현재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데 평점 9.78과 9.84로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 네이버·카카오 웹툰 플랫폼 ‘질주’
국내 웹툰 플랫폼의 시초는 지난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다음웹툰이다. 이후 20여년간 세계 시장에서 K-웹툰의 위상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은 웹툰이라는 콘텐츠와 플랫폼, 시장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알렸다. 전 세계에서 통하는 작가를 발굴하고 유명 작품이 필수적으로 거쳐가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만화 왕국’ 일본에서도 최고 매출 기록을 경신하며 최근에는 북미와 유럽, 동남아 시장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특히 시장마다 다양한 플랫폼을 만들어 국가별 전략을 펼치고 있다. 네이버웹툰은 미국 ‘웹툰(WEBTOON)’, 일본 ‘라인망가’, 동남아 ‘라인웹툰’ 등으로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미국 ‘타파스’ ‘래디쉬’ ‘우시아월드’, 태국·대만·인도네시아 ‘카카오웹툰’ 등이다. 일본은 ‘픽코마’가 진출해있다.
고무적인 점은 만화 종주국인 일본에서 양사의 앱이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카오 ‘픽코마’는 지난 2020년 이후 꾸준히 일본 웹툰 앱 중 매출 1위를 차지해 왔다. 일본 만화·웹툰 앱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작년 1~3분기 누적 거래액은 757억엔(약 6900억원)을 넘기며 전년도 실적을 뛰어넘을 전망이다. 일본 시장에서 픽코마를 바짝 쫓고 있는 네이버웹툰의 라인망가와 이북재팬의 작년 1~11월 거래액은 1000억엔(약 8800억원)을 돌파했다.
글로벌 모바일 시장 데이터 분석 기업 센서타워가 발표한 ‘2023년 전 세계 만화 앱 시장 인사이트 리포트’에 따르면 카카오픽코마와 라인망가가 작년 전 세계 만화 앱 매출 순위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네이버웹툰, 4위는 카카오페이지다.
시장조사업체 스카이퀘스트 테크놀로지에 따르면 2022년 50억6000만달러(약 6조6000억원) 규모였던 전 세계 웹툰 시장은 연 평균 36.8%씩 성장해 2030년 849억3000만달러까지 커질 전망이다. 이에 애플,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도 웹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애플북스는 작년 4월 일본 이용자를 대상으로 ‘세로로 읽는 만화’ 메뉴를 신설했고, 아마존은 작년 3월 일본에서 ‘아마존 플립툰’이란 웹툰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들에 맞서 한국의 웹툰 제작환경도 점차 발전하고 있다. 작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웹툰 스튜디오’들이 여럿 생겼다. 그동안에는 1명의 작가가 기획부터 스토리 구성, 작화, 채색, 후보정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다면 스튜디오에서는 제작 과정을 분업화해 작업 속도와 완성도를 높였다.
웹툰업계 관계자는 “보통 6명 정도가 기본 팀인데 판타지, 액션물의 경우 손이 많이 가서 최대 12명이 모여 한 작품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며 “웹툰 스튜디오가 만들어지면서 선화 작가, 배경 작가, 채색 작가 등 일종의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난 셈”이라고 말했다.
서범강 한국웹툰산업협회장은 “웹툰 플랫폼들이 이전에는 없던 방식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며 단순히 서비스에 그쳤던 웹툰을 비즈니스화했고, 지금까지 성장하는 데 큰 발판이 됐다”며 “웹툰의 연출 방식이 기존 만화와 비교하면 MZ세대와 디지털에 잘 어울리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외 진출이 본격화된 만큼 더욱 다양한 장르, 형태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작가는 물론 플랫폼사들도 노력해야 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