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반도체 불황에도 국내 주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은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한 것으로 파악됐다. 업황 악화로 실적은 부진했지만 미래 먹거리를 위한 기술 투자는 줄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년도 정부의 소부장 R&D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돼 R&D 활동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동진쎄미켐, 주성엔지니어링, SK실트론 등 반도체 관련 ‘소부장 으뜸기업’ 다수가 올해 1~3분기 R&D 비용을 지난해 동기 대비 늘렸다. 소부장 으뜸기업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2021년부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핵심 전략 산업 품목의 자립화를 위해 선정·지원해왔다. 기획부터 기술개발과 실증, 생산, 판로 등 산업 전 주기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픽=정서희

◇ 영업이익 줄었는데 R&D 지출은 확대

반도체 경기 한파에 올 3분기 동진쎄미켐과 주성엔지니어링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31%, 80% 감소했지만 R&D 비용은 오히려 늘었다. 동진쎄미켐은 올 1~3분기 R&D에 392억4800만원을 투입, 지난해 동기(361억5400만원)보다 늘렸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비율도 3.34%에서 3.97%로 증가했다. 동진쎄미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PR)을 양산한다. PR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포토레지스트 공정에 쓰이는 감광액으로, 빛에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해 패턴을 그릴 때 사용되는 소재다.

주성엔지니어링도 올 1~3분기에 R&D를 위해 543억원을 투자했다. 이는 지난해 동기(514억원)보다 늘어난 수치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비율도 15.55%에서 29.17%로 올랐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원자층증착장비(ALD) 등 반도체 원판(웨이퍼) 위에 필요한 물질을 정밀하게 입히는 증착장비 사업에 주력한다. 반도체 증착장비에서 확보한 기술력을 태양광 증착장비 분야로 확대하고 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차세대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제조에 필요한 ALD 등 장비 기술 투자를 위해 연구개발 비용을 썼다.

한솔케미칼은 올해 1~3분기에 142억원을 R&D에 투자, 전년 동기(120억원)보다 기술 개발에 신경을 썼다. 한솔케미칼은 반도체·디스플레이용 화학소재와 2차전지(배터리)용 차세대 음극재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SK실트론도 같은 기간 연구개발비가 지난해 322억원에서 384억원으로 증가했다. SK실트론은 반도체의 핵심부품인 실리콘 웨이퍼를 제조한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비용도 한솔케미칼은 지난해 2.5%에서 3.3%로, SK실크론은 1.81%에서 2.50%로 상승했다.

그밖에 소부장 으뜸기업으로 선정된 네패스, 라온테크, 유진테크, 제우스 등 소부장 기업들도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비율이 지난해와 비교해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 내년도 중소벤처기업부 소부장 R&D 예산 84%나 줄어

올해 정부는 소부장 핵심전략 기술을 150개에서 200개로 확대하고, 이를 보유한 소부장 으뜸기업을 2030년 200개사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우리 소부장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슈퍼 을(乙)’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금융·투자·세제 지원 등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내년도 중소벤처기업부의 소부장 R&D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돼, 소부장 기업들의 연구개발 활동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올해 2183억원이었던 소부장 특별회계 예산은 내년 336억원으로 84.6%나 줄었다. 소부장 특별회계는 반도체와 소부장 기술 자립을 위해 만들어진 예산으로 소부장 분야 연구개발에 주로 투입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R&D 예산이 감소하면 그동안 연구개발을 지속해 왔던 소부장 기업들의 투자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이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주력 산업 분야의 소부장 국산화를 지연시킬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