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올해 실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2024년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변화보다 안정을 택했다. 이번 인사의 특징적인 포인트는 과거 이건희 선대회장이 추진했던 신수종 사업을 연상케하는 '미래사업기획단'이 신설됐다는 점이다. 2010년대 들어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반도체 신화를 일궈냈던 전영현 삼성SDI 부회장이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컴백했다.
내년부터는 삼성전자 실적의 핵심 부문인 반도체 시황이 본격적인 반등에 나설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경계현 DS부문장(사장)을 유임시켰다. 여기에 이재용 회장이 여전히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있는 가운데 경영진에 과감한 변화를 주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상황도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돌아온 반도체 신화 전영현, JY 신뢰 업고 신사업 추진
한때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DS 부문장)의 후계자로 꼽혔던 전영현 삼성SDI 부회장이 미래사업기획단을 맡은 것이 이번 삼성전자 정기 인사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와 배터리 사업을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킨 주역으로, 권오현 전 회장을 비롯해 삼성 내부적으로도 두루 신뢰 받았던 기술 전문가로 꼽힌다.
전 부회장은 지난 1991년 LG반도체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근무한 이후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겼다. 메모리사업부에서 D램 설계팀장, 개발실장을 거쳐 메모리 전략마케팅팀장, 메모리사업부장 등 전형적인 최고경영자(CEO) 코스를 밟아왔다. 삼성 반도체 내부에서도 LG 반도체 출신이 정통 CEO 루트를 밟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2017년 권오현 전 회장의 후임자로 김기남 부회장이 선택되면서 이후 전 부회장은 삼성SDI로 자리를 옮겼었다.
전 부회장은 특히 권오현 전 회장과 옛 삼성 미래전략실 주요 인사들로부터 두루 신뢰 받았던 흔치 않은 인물 중 하나다. 삼성 안팎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권오현 전 회장이 퇴임하면서 미래 삼성전자 반도체를 이끌 인물로 전 부회장을 추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권 회장이 퇴임하며 남긴 메시지에서 삼성의 미래 사업 경쟁력를 우려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권 회장은 전 부회장을 변화를 이끌 적임자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도 전 부회장의 컴백이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중심으로 미래 먹거리 발굴에 첫 단추로 꿰었다고 해석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은 삼성전자 뿐 아니라 삼성 전 계열사들과 국외 사업장을 망라해 그룹 차원의 다양한 사업을 발굴할 전망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과거 삼성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추진됐던 신수종 사업 프로젝트와 비슷한 기능을 담당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건희 전 선대회장은 2010년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 의료기기 등 5개 사업을 집어 삼성의 5대 신수종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모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보긴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 글로벌 IT, 전자 시장이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대변혁기에 돌입한 만큼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신사업 발굴을 위해 '부회장급' 조직으로 편성된 미래사업기획단의 등장은 이재용 회장 시대에 새로운 먹거리 발굴이 필요하다는 삼성의 절실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글로벌 경기 침체 이면에 생성형 AI와 함께 반도체 시장뿐만 아니라 전자, IT 전반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는 가운데 변화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DX·DS 양대부문 유지하며 조직 효율화
그외에 사장단 정기 인사는 당초 예상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DX(디바이스경험), DS(디바이스솔루션)를 중심으로 한 양대 부문 체제의 투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업부 곳곳에 비어있는 리더십을 채우는 데 집중했다. 특히 한종희 부회장이 겸임하던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용석우 사장으로 채웠고, 해외 사업 대응 강화를 위해 김원경 사장의 직책을 '글로벌 퍼블릭 어페어' 실장으로 바꿨다.
이에 따라 한 부회장은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자리를 내려놓으며 DX부문장과 생활가전사업부장만 겸한다. 삼성에 정통한 관계자는 "한 부회장의 경우 CEO라는 직책과 함께 너무 많은 분야를 총괄하고 있는 만큼 업무에 과부하가 있었다"며 "이번 인사에 따라 한 부회장은 전문 분야 중 하나인 가전 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부문 역시 경계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존 시스템LSI, 파운드리사업부 조직의 틀을 유지할 전망이다. 추후 이어질 조직개편을 통해 3개 사업부에 일부 변화가 있을 전망이지만, 3개 사업부장을 주축으로 조직 운영의 효율화에 더 포커스를 맞출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DS부문 관계자는 "앞서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밝힌 것과 같이 내년부터 본격화되는 반도체 시황 반등과 함께 AI 특화 메모리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인사, 조직개편이 있을 예정이며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3나노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