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지난해부터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왔다. 어쩌면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 해야할 지도 모른다. 지난해 야심차게 내놓은 5나노 공정이 고객사에 약속했던 성능과 수율을 맞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정도 지키지 못해 위탁생산 기업으로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반도체 미세공정 전환은 극도로 난해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오랜 기간 설계에 공을 들이고 시뮬레이션을 반복해도 실제로 칩이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이론에 불과하다. 특히 고객사가 원하는 스펙을 만족시켜야 하는 파운드리는 더욱 까다롭다. 설계대로 칩을 테이프아웃(Tapeout·시제품 내놓는 최종 과정)하는 것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이를 대량 양산하는 과정에서 칩의 수율과 성능, 일정 등이 계획과 어긋나기도 한다.

파운드리 사업의 중요한 성공 열쇠로 신뢰를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해진 납기 일정에 약속된 품질의 반도체를 차질 없이 공급하는 것이 파운드리 사업의 신뢰를 결정한다. 이러한 신뢰는 한두 번의 양산 실적이나 수주 관계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소통과 시행착오, 성공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다. TSMC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1980년대부터 전 세계 팹리스(반도체설계)·전자 기업을 대상으로 쌓아온 신뢰의 결과물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습관처럼 외치는 ‘세계 최초 양산’이라는 구호에 엔비디아, 퀄컴, AMD와 같은 기업들이 좀처럼 호응하지 않는 이유도 결과적으로는 신뢰의 문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TSMC보다 앞서 세계 최초의 3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 양산을 발표했지만, 엔비디아와 퀄컴 등의 대형 고객사들은 5나노, 4나노에 이어 이번에도 TSMC의 3나노 공정을 택했다. 이론상 더 성능이 뛰어난 삼성의 3나노 GAA를 믿지 못했다는 얘기다.

TSMC라고 해서 공정전환이 완벽한 건 아니다. 애플 아이폰15에 탑재된 3나노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는 공정 전환에 따른 생산 비용 증가에 비해 성능 측면에서 ‘기대 이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이폰15가 최근 발열 이슈에 연루되면서 TSMC의 3나노 공정이 안정성 측면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 3나노부터 대폭 인상된 TSMC의 가격 정책을 못마땅해하는 대형 팹리스들도 하나둘씩 삼성전자에 다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최근 유럽 대형 고객사로부터 3나노 기반 서버용 고성능컴퓨팅(HPC) 칩을 수주하는 성과를 거뒀다. 소위 ‘빅칩’이라 불리는 최첨단 서버용 칩 양산 경험이 많지 않은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디자인하우스 파트너인 에이디테크놀로지가 따낸 계약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파운드리 협력사 생태계를 잘 가꿔놓은 삼성전자의 큰 그림이 선순환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첨단 공정 하나로 ‘한방’을 터뜨려 시장 판도를 뒤집는 건 TSMC가 수십년간 뿌리내려온 파운드리 시장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들다. 삼성전자가 시장의 신뢰를 되찾을 유일한 방법은 세계 최초, 세계 최고라는 선전 구호 대신 삼성 파운드리를 믿고 생산을 맡긴 기업에 최고의 결과물로 ‘서비스’하는 것이고, 그 결과물을 쌓아나가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다.

[황민규 전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