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가치 하락으로 원·엔 환율이 장중 8년 만에 100엔당 800원대를 기록하는 등 ‘슈퍼 엔저’가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 전자·IT 수출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기, LG이노텍 등 일본 기업들과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센서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는 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갈 전망이다.
엔저 현상은 일본 수출 기업들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앞서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 1분기 실적을 발표한 주요 기업 32개사를 분석한 결과 엔·달러 환율이 전분기 대비 평균 달러당 20엔 하락, 29개사가 약 2조9900억엔의 영업이익 증대 효과를 볼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영업이익 합계(8조2535억엔)의 36%에 해당한다.
◇슈퍼 엔저 영향, 과거와 달리 제한적
23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 LG이노텍 등 국내 주요 부품사들은 원·엔 환율 추이를 예의주시하며 기존 사업계획을 재점검하고, 시장 변화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엔저에 힘입어 일본 전자·전기 부품사인 무라타, 미쓰비시전기 등이 집중적인 수혜를 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한·일 산업의 경쟁 구도가 약화하면서 엔저와 우리 수출의 상관관계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전기·전자 업종은 여전히 양국 기업간 경합성이 높아 엔저가 가격경쟁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최근 들어 원화 강세·엔화 약세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 경합 업종의 수출 경쟁력 약화 우려가 크다.
한국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일본 기업간 제조업의 수출 경합도는 주요국 가운데 높은 수준이다. 수출 경합도란 국외 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하는 품목이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엔화 가치가 1%만 떨어져도 우리나라 기업들의 수출액이 0.61%포인트(P) 줄어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해 TV, 가전 등의 부문에서 한국과 일본의 직접 경쟁 구도가 과거에 비해 약해진 만큼 이 같은 수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분석도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2015년을 기점으로 세계 시장에서 한국과 일본이 직접 경쟁하는 품목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산업 경합도 면에서 일본 기업이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겠지만 현재는 품질과 기술 경쟁이 더 중요해졌다”면서 “전기차처럼 우리 브랜드의 글로벌 입지가 탄탄한 분야에서는 엔저로 수출에 부정적 영향이 온다고 단언하기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소부장 분야 日 영향력 강세… 韓 기업엔 장단점 있어
일본 기업들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영역에서는 엔저로 현지 기업들의 영향력이 더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전장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시장에서 무라타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의 강세가 전망된다.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MLCC는 스마트폰, 전기차, 비디오게임기 등 주요 전자기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부품이다. 차량용 반도체와 이미지센서 등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품목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삼성전자, 삼성전기, LG이노텍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이 부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핵심 장비와 소재를 일본에서 조달하는 만큼 득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엔저 현상은 국내 수출 기업들이 주요 부품을 일본에서 들여오는 단가가 낮아졌다는 의미도 된다”며 “과거처럼 TV나 가전 부문에서 일본과 직접 경쟁하는 상황은 아니며 현재 일본 수출 산업은 소부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이 절감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