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일본 나가노현 시오지리시에 있는 세이코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 해발고도 3190m의 산맥이 회사를 병풍처럼 둘러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고층 빌딩 하나 없는 한적한 마을에 세이코 엡손 사무소 건물들이 거대하게 들어서 있었다. 세이코 엡손 그룹의 핵심 사무소 중 하나인 히로오카 사무소는 면적이 도쿄돔의 4.5배에 달하는 22만㎡로, 직원 68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세이코 엡손 일본 오피스 중 가장 많은 인원이 근무하는 곳이다.
히로오카 사무소에서는 세이코 엡손의 핵심 사업인 잉크젯 프린터와 잉크젯 프린터용 프린트 헤드를 생산한다. 잉크젯 프린트 방식은 열을 가하지 않고 기계적인 진동으로 잉크를 분쇄해 내구성이 좋다는 평을 받는다. 종이뿐 아니라 패브릭(천)에도 인쇄할 수 있어 범용성이 높다. 실제 이상봉 디자이너 등 국내외 여러 디자이너들은 세이코 엡손의 직물 프린터로 오염 물질이 덜 발생하는 디지털 인쇄 의류를 만들고 있다. 히로오카 사무소엔 다양한 프린팅 기술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솔루션 센터가 있다. 대당 10억원에 달하는 대형 직물 프린터부터 폐지가 새 종이로 탈바꿈하는 친환경 종이재생장치 '페이퍼랩' 등 신개념 장치가 즐비했다.
시장의 이목을 끌고 있는 건 세이코 엡손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친환경 야심작 페이퍼랩이다. 페이퍼랩 솔루션 센터에 들어서니 폭·높이 2m 크기의 프린터에서 옅은 회색빛의 텅 빈 종이가 출력되고 있었다. 폐지에서 마술처럼 탈바꿈해 나온 새 종이였다. 폐지를 프린터 하단 카트리지에 집어넣으면 그 안에서 폐지가 분쇄되고, 분쇄된 종이가 곧바로 새 종이로 재탄생했다. 세이코 엡손 고유의 드라이 섬유 기술로 신개념 종이 업사이클링 프린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드라이 섬유 기술은 물을 거의 쓰지 않고 사용한 종이를 섬유로 분해한 뒤,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 깨끗한 종이를 만드는 방식이다.
페이퍼랩은 1시간에 A4용지 약 720장을 뽑아낼 수 있다. A4와 A3 크기를 선택할 수 있고, 일반 용지 외에 명함이나 동화책 등에 쓰이는 두꺼운 종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 프린터 앞면을 열면 파랑, 노랑, 분홍, 흰색 가루 등 총 6개 종류의 가루가 분류돼 있다. 원하는 종이 색상과 두께를 선택하면 이에 맞는 가루가 분사돼 새 종이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나온 종이 가격은 일반 용지에 비해 1.5배가량 비싸다. 다만 특수 용지일수록 가격 차이가 줄어들어 카탈로그나 달력 등에 두루 쓰인다고 한다.
페이퍼랩 가격은 25000만엔(약 2억3600만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기밀문서를 외부에 반출하지 않고 내부에서 바로 폐기할 수 있어 정부 기관이나 금융기관 등 보안 유지가 중요한 곳에서 활용도가 높다. 2016년 일본에 처음 출시된 뒤 현재 일본과 유럽의 여러 은행과 보험사, 건설사, 공공기관 등에 도입됐다. 한국에는 내년 이후 출시 예정이다. 오가와 야스노리 세이코 엡손 최고경영자(CEO)는 "현재 페이퍼랩을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데다 한국 시장의 수요가 많은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서 먼저 테스트를 거친 후 더 개선된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고 말했다.
내년쯤 한국에 처음 선보이는 페이퍼랩은 크기가 더 작아지고 기능이 업그레이드된다. 현재까지 나온 제품은 파쇄기가 프린터에 하나로 묶여있는데, 이를 따로 빼 크기를 줄이고 보안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세이코 엡손 관계자는 "그동안은 폐지를 따로 운반해 기계에 넣어야 했지만, 파쇄기가 따로 있으면 파쇄된 종이만 기계에 넣으면 돼 보안에 더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또 새로운 모델에서는 새로 나온 종이를 사용한 뒤 폐지가 되면 다시 그 종이를 페이퍼랩에 넣어 새 종이로 만들어 낼 수 있게끔 했다. 재활용한 종이를 수차례 다시 재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날 설명을 맡은 히오로카 사무소 직원은 페이퍼랩을 두고 "적극적으로 환경 보호를 실천해 나가기 위해 고안한 제품"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미 사용한 폐지를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목재 사용과 더불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고, 극소량의 물을 사용해 일반 종이를 생산할 때 보다 99%의 물을 아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세이코 엡손 관계자는 "페이퍼랩은 시스템 내부 습도 유지를 위해 한 컵 분량의 물만 쓰기 때문에 폐수 문제도 거의 없고, 큰 배관 공사도 필요 없다"며 "잉크 제거를 위해 물을 대량으로 쓰는 일반 폐지 재활용 설비와는 대비되는 장점"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