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배경지이자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일본 나가노현 스와시에는 '세이코' 시계와 '엡손' 프린터·프로젝터로 유명한 세이코 엡손 본사가 있다. 세이코 엡손은 글로벌 매출 100억달러(약 13조원)를 넘긴 일본의 대표적인 IT기업이다. 정밀 공업에 적합한 건조한 기후 덕분에 스위스를 본떠 1942년부터 시계 산업을 육성한 스와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지난 80년간 세이코 엡손은 '고효율' '초소형' '초정밀'을 회사 DNA에 새기면서 혁신을 거듭했다. 1963년 높이 2.1m, 너비 1.3m에 달했던 쿼츠(Quartz) 시계를 가로 16㎝, 세로 20㎝로 확 줄인 이른바 '쿼츠 혁명'이 그 시작이다. 세이코 엡손은 이듬해 도쿄올림픽 공식 시간 기록원으로 채택된 것을 계기로 프린터를 개발했다. 시합에서 측정한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이 정확해지면서 시합 결과를 두고 나오는 항의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런 기술을 토대로 세이코 엡손은 1968년 세계 최초의 미니 전자 프린터(EP-101)를 출시했다. EP-101 프린터 같은 후속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EP의 자손들'이라는 뜻의 엡손(EPSON) 브랜드가 탄생했다.
이후 세이코 엡손은 1969년 수정 진동자에 전기를 흘려 작동시키는 전자식 쿼츠 손목시계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시간 오차가 잦았던 기계식 시계에서 탈피해 일상에서 더 정확한 시간을 잴 수 있게 됐다. 1994년엔 잉크젯 프린터를 출시해 집에서도 사진을 인쇄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밖에 세이코 엡손은 정밀 시계 제조 기술을 활용해 프로젝터, 로봇 등 다양한 신개념 제품을 만들어 냈고, 디스플레이·전자공학·바이오·생명 과학 분야로 사업을 넓히고 있다.
전 세계 프로젝터와 스카라 로봇(인간의 팔구조를 본뜬 다관절 로봇) 시장 점유율 1위인 세이코 엡손의 지난해 매출은 1조3303억엔(약 12조6800억원). 영업이익은 951억엔(9000억원)이다. 이 중 96% 이상이 프린터와 프로젝터에서 나왔다. 스와호숫가 공장 한켠에서 시계 사업으로 발을 뗀 회사는 현재 전 세계 81개 회사에서 8만여명의 직원을 둔 기업이 됐다. 세이코 엡손은 2050년까지 '탄소 네거티브'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놓고 제조 공정부터 제품 판매 단계까지 탈탄소화를 추진하고 있다. '탄소 네거티브'는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제로(0)'로 만드는 탄소 중립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으로, 제품을 만드는 행위로 탄소를 오히려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3일 스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세이코 엡손 본사에서 오가와 야스노리 세이코 엡손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오가와 CEO는 "환경 의식이 높은 한국 시장은 상당히 중요하다"며 "한 달 전 한국에 방문해 대학교 주변을 돌면서 한국의 교육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꼈고, 향후 교육과 관련된 제품을 한국 시장에 맞게 상품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대기업들과도 미래 사업을 위해 협업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가와 CEO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1988년 세이코 엡손에 입사해 30년 넘게 프로젝터 등 제품·기술 개발에 주력해 왔다. 2018년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거쳐 2020년 CEO 자리에 올랐다. 다음은 오가와 대표와 일문일답.
ㅡ종이 문서 대신 디지털 전자매체를 통해 각종 업무를 처리하는 페이퍼리스(paperless) 시대로의 전환이 가속화하고 있다. 프린터 시장이 작아지고 있는데, 엡손의 대비책은 무엇인가.
"종이를 쓰지 않는 추세는 확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에 환경적인 부하를 줄이는 관점에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우선 오피스 시장이 앞으로 엡손에 매우 큰 기회가 될 것이다. 현재 대부분 오피스에선 인쇄시 열이 매우 많이 발생하는 레이저 프린터를 쓴다. 반면 엡손의 잉크젯 프린터는 열을 가하지 않고 기계적인 진동으로 잉크를 분쇄한다. 열이 발생하지 않아 내구성이 좋고, 인쇄 단계를 줄여 레이저 프린터에 비해 전력 소비량을 85%가량 줄일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도 환경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따라서 오피스용 레이저 프린터가 잉크젯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면 엡손 입장에선 매우 큰 시장이 열리게 된다. 이밖에 친환경 종이 재활용 프린터를 세계 최초로 출시하는 등 새로운 시장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세이코 엡손이 바라보는 한국 시장 상황은 어떤가. 투자 계획도 있는지.
"한국은 성장하는 시장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한국엡손은 엡손 그룹의 글로벌 성장에 일조하고 있다. 전 세계 트렌드이긴 하지만, 한국 시장은 특히 환경과 관련된 부분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고 있어서 엡손의 친환경적인 제품과 연계해 한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또 한국은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 교육산업에서 엡손의 성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 대학가에 있는 인쇄소를 다니면서 한국의 교육열이 매우 대단하다는 걸 체감했다. 한국은 스크린골프 같은 엔터테인먼트나 예술 분야 수준도 상당히 높다. 따라서 엡손은 교육과 관련된 프린터, 엔터테인먼트에 쓰이는 프로젝터 등 한국에서의 상품 개발에 더 주력할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는 대기업 많아 이들과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기 위한 협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2030년까지 전사적으로 친환경 기술 개발에 1조원을 투자할 계획을 내놨다. 친환경 기술 개발은 투입 비용 대비 수익성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무엇인가.
"단기적으로는 수익성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엡손은 회사가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가 친환경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고 있다. 당장 큰 이익을 보지 못하더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잉크젯 프린터인데, 앞서 말했듯 레이저 프린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친환경적인 인쇄 방식이다. 이 기술을 패션 산업으로 확장해 원단에 직접 프린트를 하면, 환경 오염 물질이 다량 배출되는 기존 의류 생산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이처럼 제품부터 친환경적으로 만들어 내놓는 것이 우리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보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앞서 엡손은 전 세계 모든 생산 공장과 판매 법인의 동력을 100% 재생 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RE100을 선언했다. 현재 일본, 이탈리아, 영국, 미국 포틀랜드, 태국, 필리핀, 중국 등의 생산 공장에서는 이미 RE100을 달성했는데, 어떻게 이를 달성할 수 있었는지. 한국 기업에도 조언을 해준다면.
"가장 중요한 건 환경을 더 신경쓰겠다는 강한 의지다. 환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점차 사회에서 기업에 바라는 것이 이런 방향이라는 점을 먼저 잘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서 하자' 정도의 마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부터 우리가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마인드를 항상 지니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친환경이 사회가 원하는 방향임을 이해하고 이를 실행하려는 강한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