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년 전통의 광학 전문 기업 독일 자이스는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기 핵심 부품인 렌즈와 광학 장치를 독점 공급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최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인 EUV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인텔,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들은 줄을 서서 기다린다. 장비 수요가 늘 공급을 앞서 ASML은 '슈퍼 을(乙)', 핵심 부품 공급사인 자이스는 '슈퍼 병(丙)'으로 불린다. 자이스가 슈퍼 병으로 활약하는 분야는 비단 EUV 노광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공정인 노광 공정 곳곳에 자이스의 기술이 쓰인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성을 주목한 자이스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반도체·전자현미경 연구개발(R&D) 센터를 지으면서 시장 확장에 나섰다. 한국에서 자이스는 반도체의 밑바탕이 되는 포토마스크 공정 솔루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주 고객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직접 포토마스크를 생산하고 있어 포토마스크 공정에 쓰이는 장비 수요가 높다. 국내 반도체 업계 수요에 힘입어 자이스코리아 매출 규모는 자이스가 진출한 50여개국 중 4번째로 크다.
포토마스크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가로·세로 6인치 유리 기판에 원하는 전자회로를 그린 뒤 빛을 쏴 이 회로를 웨이퍼 위에 옮기는 밑그림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빔프로젝트에서 빛을 쏴 스크린에 비추는 내용을 담고 있는 슬라이더와 비슷한 기능이다.
텅 빈 유리 기판에 밑그림을 잘 그려야 결함 없는 반도체가 생산되는데,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단위의 섬세한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 대부분에 자이스 기술력이 빛을 발한다. ▲포토마스크 유리 기판에 패턴이 잘 그려져 있는지 검사하고 ▲패턴을 제대로 정렬하고 ▲포토마스크를 실제 검증해보고 ▲수리하는 각각의 장비를 자이스가 공급하고 있다. 이런 포토마스크 공정에서만 8개 종류 이상의 각기 다른 장비가 필요하다. EUV 포토마스크 결함을 체크하는 장비의 크기는 버스만 하고, 무게는 15톤(t)에 달한다.
반도체 전(前) 공정 장비 생태계를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 자이스가 강조하는 건 '고객사의 문제 해결'이다. 국내 고객사의 반도체 팹(공장)에 설치한 포토마스크 장비를 책임지는 자이스코리아 반도체 마스크 솔루션 부문 이영표(43) 팀장을 지난달 27일 서울 송파구 자이스코리아 본사에서 만났다. 반도체 장비를 수시로 체크하고 수리하는 필드 서비스 엔지니어(FSE)로 2006년 업계에 발을 들인 이 팀장은 에드워즈코리아,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코리아를 거쳐 2017년부터 자이스코리아에서 일하고 있다.
필드 서비스 엔지니어는 고객사가 원하는 사양에 맞춰 팹에 장비를 설치하고, 장비가 문제 없이 기능할 수 있도록 유지·보수를 한다. 이 팀장은 "자동차를 주기적으로 정비하듯 반도체 장비도 소모품을 교체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필드 서비스 엔지니어가 하는 것"이라며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엔지니어가 팹에 들어가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해 해결책을 제공하거나 고객사의 니즈에 맞게 솔루션을 개선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반도체 팹은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에 고객사에서 장비에 문제가 생겼다고 알려오면 언제든 달려가는 게 필드 서비스 엔지니어의 숙명"이라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반도체 팹으로 들어가야 하고, 며칠 동안 쪽잠을 자며 문제 해결에 매달리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현재 자이스코리아의 필드 서비스 엔지니어는 60명으로, 모두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세대)다. 이 팀장은 "언제 어디서 문제가 발생할지 몰라 긴장을 늦출 수 없고 몸이 고되지만, 고객사 문제를 해결했을 때 밀려오는 성취감이 매우 크다는 게 공통적인 의견"이라고 말했다.
자이스코리아 엔지니어들은 핵심 고객사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과 가까운 경기 동탄에서 근무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현장에 투입돼 기술 지원을 하기 위해서다. 이 팀장은 "반도체 공정의 첫 단추인 포토마스크 양산에 실패하면 그다음 단계인 웨이퍼(반도체 기판) 생산에도 연쇄 차질이 발생하므로 제조사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장비에 문제가 없게끔 유지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매번 쉽게 풀리는 것만은 아니다. 이 팀장은 "문제가 복잡할 땐 일단 현장 조치를 취한 뒤 팀원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독일 본사에서도 원격 기술 지원을 한다"며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본사 엔지니어가 파견돼 함께 현장 지원에 나선다"고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매달리던 문제를 다 같이 해결해 결국 고객사의 생산성이 향상됐을 때 느끼는 보람이 크다"고 했다.
자이스는 현재 국내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과 향후 5년 뒤 로드맵을 논의하고 있다. 반도체 미세 공정 양산에 성공하려면 포토마스크 공정 장비부터 제조사 목표에 맞게 적기에 공급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팀장은 "고객사와 최소 5년 후 선단 공정 로드맵을 함께 공유하고 그에 발맞춰 제품 개발 및 솔루션을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며 "장비 하나가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공정 목표가 다 틀어지게 되므로 고객사 로드맵이 나오는 순간 수천개의 협력사 생태계가 그 로드맵에 발맞춰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이스 협력사는 1200곳이 넘는다.
16년간 복잡다단한 반도체 장비와 동고동락한 이 팀장은 "매일 빠르게 바뀌는 기술을 다루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고객사를 감정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말했다. 그는 "고객들도 당장 중요한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압박을 받고 예민해진다"며 "이들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고 장비는 어떤 상태인지 기술적으로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감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 내 경력을 통틀어 돌아보니 결국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