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말 베트남 하노이 인근 삼성전자 법인(SEV)을 방문해 스마트폰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회장의 삼성전자(005930) 등기이사 복귀가 불발됐다. 다음달 정기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 주총 안건에서 빠졌다. 지난해 10월 27일 회장으로 취임한 뒤 110일이 지났지만, 이 회장은 여전히 미등기임원인 상태다. 국내 4대 그룹 총수 중 미등기임원은 이 회장이 유일하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이 늦어지는 배경으로 '사법 리스크'를 꼽는다. 책임 경영 강화 차원에서 등기이사에 오를 수 있지만 부당합병, 분식회계 의혹 등 재판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사법 리스크 해결이 우선이라는 판단인 것이다. 재계에서는 또 이 회장의 경영 철학과 비전을 제시할 이른바 'JY 신경영'을 선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초 회장으로 취임할 경우,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인사 등이 예고됐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뉴스1

◇ 이재용 등기이사 선임안 제외... 이미 총수로서 역할

14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이날 오전 이사회를 열고 주주총회 소집일과 안건 등을 논의했다. 이날 발표된 주총소집공고에는 이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건이 포함되지 않았다. 주총 안건으로는 ▲2022년 재무상태 승인 ▲한종희 사내이사 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이 논의된다. 주총은 다음달 15일 오전 9시에 열린다.

앞서 이 회장은 부회장 시절인 2016년 10월 부친인 등기이사직을 맡은 바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며, 같은 해 11월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는 등 사법 리스크에 휘말렸다. 이에 2019년 10월 재선임 안건을 따로 상정하지 않고 임기가 만료돼 현재까지 미등기임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 회장을 제외하고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회장은 모두 사내이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DX부문장 부회장)./뉴스1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책임 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등기임원에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작년 10월 27일 삼성전자 이사회는 이 회장의 승진 안건을 의결한 이유로 책임 경영 강화와 경영 안정성 제고,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제시했다. 등기임원은 미등기임원과 달리 이사회 구성원으로 기업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진다.

이 회장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에서 이미 삼성그룹의 법적 총수로 지정된 상태다. 등기이사 선임 없이도 사실상 삼성그룹의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재계 서열 1위인 삼성을 이끄는 회장으로서 이미 도의적인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회장이 등기이사로 선임되는 데는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 지난해 특별사면으로 복권돼 취업제한 문제가 해결됐고, 정관상 삼성전자 이사회는 3~14명으로 구성토록 돼 있어 등기이사 복귀에 문제가 없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사내이사 5명, 사외이사 6명 등 11명으로 구성됐다.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DX), 경계현 대표이사 사장(DS), 노태문 사업부장(MX), 박학규 경영지원실장(DX), 이정배 사업부장(메모리) 등이 사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 사외이사가 사내이사보다 한 명 더 많기 때문에 이 회장이 사내이사로 합류해도 사외이사를 과반수로 구성해야 한다는 상법에 부합한다.

◇ 이미 총수로서 법적·도의적 책임... JY 신경영 시간 걸릴 듯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가 늦어지는 배경에는 사법 리스크가 꼽힌다. 현재 이 회장은 매주 목요일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혐의 재판에, 3주 간격으로 금요일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2019년에도 사법 리스크를 고려해 사내이사를 연임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무리하게 등기임원 복귀를 추진할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회장이 평소 전문 경영인·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강조해온 소신도 등기이사 선임이 늦어지는 이유다. 경영은 전문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에 맡기고, 본인은 오너로서 기업의 영업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네트워크 구축에 힘을 싣겠다는 전략이다. 앞서 이 회장은 2020년 5월 6일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을 공식화했다.

일각에서는 'JY 신경영'이 선포되기에는 아직 사업적인 성과를 채울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병철 창업회장은 거침없는 투자를 통해 1983년 도쿄선언 6개월 만에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64K D램 개발 성과를 이뤘다. 1년 뒤에는 삼성반도체 기흥1공장을 준공하며 세계 세번째 반도체 생산국으로 거듭났다. 이건희 회장 역시 1993년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품질의 삼성'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지난 4분기 연결기준으로 매출 70조원, 영업이익 4조300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8.58%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69% 감소했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공급망 교란, 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외적인 리스크가 높은 상황이다.

특히 이 회장이 강조해온 시스템 반도체와 바이오를 양대 축으로 인공지능(AI)·6G, 로봇 등 신성장 IT사업의 경우, 뚜렷한 성과가 아직 도출되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상 이 회장이 삼성의 100년을 책임질 신경영 선포를 위해서는 아직 사업적인 성과물이 더 쌓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 일부라도 유죄 판결이 나오면 또다시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는데 무리해서 당장 등기임원에 오를 이유는 없을 것 같다"며 "사업적인 성과로 내실을 다지면서 향후 준비가 된 시기에 등기이사 복귀는 물론, JY 신경영이라는 미래 비전을 선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