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역대 1월 매출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불황에 파운드리 업계 역시 주문 감소와 가격 하락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지만, TSMC는 1월에도 견조한 실적을 내면서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14일 TSMC 집계에 따르면 회사의 지난 1월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16.2% 증가한 2000억5100만대만달러(약 8조3800억원)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과 비교하면 3.9% 증가했다. 이는 시장 전망치를 웃도는 수치로, 시장 전문가들은 올 상반기 TV·PC 등 전방 산업 수요가 더 위축되면서 TSMC의 1월 실적도 악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TSMC가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자 시장에서는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과 함께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4분기부터 주요 고객사인 AMD, 엔비디아, 인텔, 미디어텍 등이 수요 저하와 재고 급증으로 주문을 대폭 줄이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오픈AI의 챗GPT 관련 긴급 수요가 실적을 견인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엔비디아, AMD 등 고객사들의 HPC(고성능컴퓨터) 프로세서 긴급 주문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며 "오픈AI는 연산 수요 급증으로 엔비디아 H100 프로세서를 1만개 이상 주문했는데, 이 프로세서는 TSMC에서 전량 제조한다"고 말했다.
도 연구원은 "HPC 관련 프로세서에 주로 쓰이는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 이하 공정에선 TSMC의 시장 점유율이 독보적이기 때문에 사용자가 늘면서 추후 주문량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이런 수요에 따라 올해 TSMC의 5㎚ 이하 공정 캐파(생산량) 비중은 엔비디아 25%, AMD 20%, 애플 40%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가동률에는 큰 변화가 없어 1월 성적표는 '반짝' 실적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지난해 3분기 말 들어온 주문이 지난달에서야 이행된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위민복 대신증권 연구원은 "오픈AI에 따른 수요는 조금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되지만, 큰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챗GPT의 기반이 되는 GPT-3는 2020년도에 출시돼, 빅테크 업체들의 기존 투자 계획에 이미 AI 수요가 녹아있다. 가동률 역시 60~70%까지 내려온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갑자기 오픈AI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도 "5㎚ 이하 공정 가동률은 70%대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7㎚, 6㎚ 라인의 가동률도 올해 초 50%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에는 변함이 없다"며 "1월 매출은 지연된 수주에 따른 예외적인 상황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TSMC가 제시한 예상 전망치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1월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TSMC는 올 1분기(1~3월) 매출 예상치를 전년 동기 대비 16%가량 감소한 5250억대만달러(약 22조원)로 제시했다. 1월 매출로 8조원을 넘겼으나, 2~3월 두 달 동안의 실적이 13조원대에 그칠 것으로 본 것이다.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컨퍼런스콜에서 "세계 경제 둔화에 따른 주요 고객사의 수요 감소로 1분기 매출 감소가 예상되며 연간 설비 투자를 소폭 삭감할 계획이다"면서 "다만 올 하반기부터는 AI 관련 신제품 출시로 반등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TSMC와 달리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 업체 대부분의 1월 실적은 악화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파운드리 업계의 불황이 본격화하면서 TSMC를 제외한 대부분 업체는 올해 역성장할 전망이다. 세계 2위인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은 원가 경쟁력이 TSMC에 비해 낮고 수요까지 둔화해 올해 적자를 낼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TSMC는 가동률이 줄더라도 압도적인 물량 비중과 제품 성능이 받쳐주고 있지만, 삼성은 TSMC보다 이익률이 낮아 예상치 못한 수요가 나타나지 않는 한 적자를 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TSMC는 올해 나홀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도 연구원은 "3㎚ 공정에서도 TSMC의 시장 장악력이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며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 업체 대부분이 전년 대비 실적이 감소할 전망이지만, TSMC는 공정 우위를 통한 HPC 프로세서 수주 등을 통해 전년 대비 한자릿수 초반의 매출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위 연구원도 "규모의 경제가 매우 중요한 반도체 산업 특성상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TSMC가 원가 측면에서 삼성 파운드리보다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