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손민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3년간 수많은 스타트업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결과, 스타트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이 동네 ‘인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타트업 성공의 핵심은 네트워킹이다. 나 혼자 열심히 좋은 서비스를 만든다고 끝이 아니다. 한국인에겐 익숙하지 않겠지만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현지 기업 관계자와도 무턱대고 만나서 인사하고, 건너 건너라도 투자자를 소개받아야 한다. 결국 현지의 ‘사람’으로부터 결국 모든 투자와 사업의 기회가 나온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 정보기술(IT) 스타트업의 허브이며 한국 스타트업에도 꿈의 무대이다. 비영리단체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의 90% 이상이 해외 진출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 중 40% 가까이가 미국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 동남아시아(25.6%), 일본(9.1%) 등과 비교해 압도적 1위다. 제한된 내수시장을 뛰어넘어 IT 본토인 미국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스타트업의 오랜 염원이기 때문이다.

박용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미국 실리콘밸리 무역관장은 이러한 스타트업의 중심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자타공인 ‘인싸’다. 미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과 미국 현지 기업, 여러 현지 투자자 등 다양한 업계 관계자의 연락처만 스마트폰에 수천개, 매일 점심 미팅과 티타임으로 그의 스케줄은 꽉 차 있다. 1995년 코트라 입사 후 일본, 캐나다, 중국 등을 거친 후 2020년 실리콘밸리 무역관장으로 부임한 그는 이곳에서의 하루가 그 도시 무역관에서의 하루보다 바쁘다며 웃었다.

그래픽=손민균

그런 박 관장이 이끄는 코트라 실리콘밸리 무역관은 스타트업의 메타인 이곳에서도 한국 스타트업의 사랑방이다. 무역관이 처음 문을 연 1998년 이후로 수년간 코트라가 확보한 현지 네트워크가 한국 IT 스타트업의 플랫폼인 이곳에 모이기 때문이다. 코트라 독립형 사무실과 공유오피스에는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 50여곳이 입주했다. 분야별로는 소프트웨어(31%)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반도체(27%), 모빌리티(15%), 하드웨어(15%), 인공지능(12%) 순이다.

이들을 포함한 스타트업을 위한 다양한 투자설명회, 마케팅 전시회, 채용 박람회, 네트워킹 행사 수십 개가 정기적으로 이뤄진다. 올해에만 약 300여개 한국 스타트업이 다양한 지원 사업에 참여했다. 미국에 진출하는 스타트업이 늘면서 2019년 대비 절반 가까이 증가한 규모다.

지난달 6일(현지 시각) 미국 실리콘밸리 사무실에서 만난 박 관장은 위기일수록 결국 스타트업은 사람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잠시 사람의 교류가 끊겼던 시기가 있었고 이는 스타트업에 치명적인 만큼 다시 네트워킹 기회를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법인을 설립하고 현지에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과 한국인이 미국 현지에서 직접 창업한 스타트업 모두 코트라 지원 대상이다.

박 관장은 “실리콘밸리 무역관에서 매년 여는 전시회 등 행사에 참여해 한국 기업과 협업 관계를 유지하거나 계약을 하는 등 ‘매칭’되는 현지 기업과 투자사 등만 해도 600여곳에 달한다”라며 “반도체 등 하드웨어 기업이나 소프트웨어 기업, 벤처캐피털(VC) 등 코트라가 ‘고객’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매우 많다”라고 했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역시 다양한 코트라 행사에 참석해 미국에서 함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국내 스타트업을 찾기도 한다.

2022년 12월 6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위치한 KOTRA 실리콘밸리 무역관이 개최한 네트워킹 행사에서 미국 현지 투자사, 업계 관계자와 미국 진출을 준비하는 국내 스타트업 관계자가 대화하고 있다. /이소연 기자

이날 오후에도 무역관에선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인 한국 스타트업 12곳이 현지 유관 기업과 투자사 등에 자사 사업모델을 소개하는 투자유치 행사인 ‘K-데모데이’에 수십명이 참석할 예정이라며 그는 무역관을 ‘항상 복작복작한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박 관장은 “미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국 스타트업은 투자자를 만나는 기회 자체를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라며 “이러한 행사에 지원해 자신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코트라가 이토록 많은 현지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었던 이유는 20여년간 역대 관장 등 코트라 인력이 미리 이들과 관계를 형성해뒀기 때문이다. 박 관장은 “나 역시 부임 이후 한국에서 크게 사업을 하는 기업 등 현지 기업에 직접 방문해 이들을 주요 바이어로 관리했다”라며 “직접 발로 뛰며 한국 사업, 한국 스타트업과의 교류에 관심 있는 기업을 발굴하고 있다”라고 했다.

박 관장이 꼽은 현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스타트업의 성공 비결은 ‘네트워킹’이다. 알음알음 투자 등이 진행되는 좁은 스타트업 업계에서 외부인인 한국인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 특히 언어장벽까지 있는 경우 큰마음을 먹고 현지까지 왔으나 업계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고 겉으로만 맴돌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기업도 여럿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 문화엔 익숙하지 않지만, 정해진 식순이나 사회자의 주도 없이 여럿이 한 방에서 각자 삼삼오오 서서 칵테일을 마시며 인사하고 자신의 사업을 소개하는 여러 네트워킹 파티가 실리콘밸리에선 흔하다. 이때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고 자신을 소개하며 ‘사람’을 얻어간 스타트업이 결국 현지에서 성과를 낸다는 것이 박 관장이 내린 결론이다. 결국 스타트업은 여럿 앞에서 반복적으로 수많은 ‘피칭(사업발표)’을 하며 자신의 사업을 널리 알려야 하는데 이 기회를 얻기 위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끼리의 네트워킹도 중요하다고 박 관장은 설명했다. 현지에선 똘똘 뭉쳐 서로 일자리와 사람 등을 소개해주는 인도인이나 중국인 네트워크와 달리 한국인의 경우 뿔뿔이 흩어져 있어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 박 관장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종사자들이 서로 네트워킹할 수 있도록 한국계 행사 장소를 제공하고 행사 스폰서가 되고 이들을 위한 멘토링 행사를 여는 등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라며 “현지 진출한 스타트업이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때엔 현지 행사를 통해 리크루팅을 돕기도 한다”라고 했다.

코로나19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역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있다고 박 관장은 진단했다. 박 관장은 “코로나19 확산이 극심했던 시기엔 코트라 사무실에도 스타트업 신규 입주가 많이 줄어 고정적인 사무실 대신 공유오피스를 만들기도 했다”라며 “다만 지금은 다시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이 늘고 있어 이젠 입주하려면 수개월을 대기해야 할 정도로 회복했다”라고 했다.

그간 코트라가 한시적으로 온라인에서 진행하던 행사도 다시 오프라인에서 열리고 있으며 더 많은 기회가 앞으로도 미국에서 열릴 것이라고 박 관장은 설명했다. 그는 “쿠팡이 현지에서 상장하는 등 많은 국내 스타트업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현지 인지도와 관심이 높아진 상태다”라며 “미국 현지에 와 사람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 기회를 찾는다면 스타트업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