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욱성 SK하이닉스 차세대상품기획 부사장. /SK하이닉스 제공
“SK하이닉스가 개발한 CXL 기술은 메모리 반도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마스터키(만능열쇠)’입니다.”

강욱성 SK하이닉스 차세대상품기획 담당 부사장은 지난달 29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시대에 접어들면서 반도체 분야에도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강욱성 부사장은 SK하이닉스에서 고성능컴퓨팅(HPC)에 최적화된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Compute Express Link)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핵심 인물로 꼽힌다.

강 부사장은 과거 인텔, 삼성전자 등에서 메모리 반도체 설계를 담당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삼성전자에서 2004년부터 12년간 D램 설계자로 활약했고, 2016년 인텔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메모리 기술과 아키텍처 전반에 관여했다. 이후 2018년에 SK하이닉스로 자리를 옮겨 현재는 차세대 메모리 개발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 메모리 성능·용량 끌어올릴 혁신 기술 개발

CXL이란 두뇌 격인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 반도체 사이의 도로를 기존 2~3차선에서 8차선, 10차선 이상으로 대폭 늘리는 최첨단 인터페이스 기술이다. 기존에는 CPU가 지원하는 메모리 인터페이스에 따라 DDR4, DDR5 등 특정한 규격에 맞는 반도체만 사용할 수 있지만, CXL 기술을 접목하면 종류나 용량, 성능 관계없이 어떤 메모리도 탑재할 수 있게 된다. D램의 용량을 8~10배 이상 늘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강 부사장은 “CPU에서 CXL 전송 방식을 지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종류의 메모리도 CXL 메모리에 탑재해 활용이 가능하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메모리 설계 구조, 메모리 종류, 컨트롤러 사양 적용에 대한 완전한 자유도가 생긴다는 의미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메모리와 컨트롤러 차별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 창출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손민균

메모리 반도체 미세공정 혁신의 속도가 늦춰지고 있는 가운데 CXL의 등장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실제 한국 반도체 기업의 주력 수출 품목인 D램의 경우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대에 접어들면서 공정전환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생산성, 성능 향상폭이 현저히 둔화됐으며 심지어 생산비용도 점점 늘고 있다. 10㎚ 이하 D램의 경우 대당 2000억원이 넘는 극자외선(EUV) 장비가 필요해 설비투자 부담이 커진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D램이나 낸드플래시는 그동안 미세화를 통해 작은 칩 안에 최대한 많은 용량을 넣는 방식으로 생산성과 성능을 높여왔다”며 “하지만 최근 들어 반도체 미세화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서버용, 모바일, PC용 D램의 고용량·고성능화도 더 어려워지는 추세다. CXL은 이런 천문학적 설비투자가 필요한 미세공정 없이 초고속 인터페이스 기술로 D램, 낸드플래시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다”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부터 CXL 기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강 부사장은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라며 “SK하이닉스의 주력 매출 품목인 D램이나 낸드플래시와 달리 아직 시장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래 상황을 예측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사업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 부사장을 비롯한 SK하이닉스 기술진의 뚝심과 집념으로 CXL 연구개발을 본격화한 SK하이닉스는 지난해부터 성과를 하나둘씩 내놓고 있다. 지난해 8월 SK하이닉스는 첫 CXL 메모리 시제품을 개발해 공개했다. 서버용 D램으로 내놓은 이 제품은 최신 기술 표준인 DDR5 규격으로 96GB(기가바이트)의 고용량으로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후 10월에는 CXL 메모리에 연산 기능까지 추가한 연산메모리솔루션(CMS)을 공개하며 프로세싱인메모리(PIM) 분야에도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 CXL로 ‘메모리 중심 컴퓨팅’ 시대 연다

SK하이닉스가 CXL을 통해 최종적으로 목표로 삼고 있는 플랫폼은 다수의 서버, 사용자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공유하는 ‘메모리 풀(pool)’ 시스템이다. 강 부사장은 “(빅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거대한 메모리 풀의 시대가 오면 또 다른 차원으로 거대한 도약을 할 수 있다”라며 “CXL 기술의 등장으로 시스템 간 공통된 인터페이스를 통해 내가 가진 (메모리) 리소스뿐만 아니라 남의 것, 내 이웃의 리소스까지 내 것처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메모리 풀' 기반의 컴퓨팅 구조 예시. /HPE

하나의 거대한 공유 메모리 풀을 다수의 서버, 사용자가 사용하는 이 개념은 앞서 세계적인 데이터센터 기업들이 이론적 수준에서만 제시했던 개념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메모리 중심 컴퓨팅(Memory-Driven Comput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메모리 중심 컴퓨팅은 CXL과 같은 다수의 메모리 저장장치를 고속의 패브릭(Fabric)으로 수백, 수천개 연결해 거대한 공유 메모리를 구성하는 컴퓨팅 아키텍처를 말한다. 이 공유 메모리 풀을 통해 복수의 컴퓨팅 노드가 각자 데이터를 병렬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 컴퓨터의 정보 처리 속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메모리 자원이 공유되는 만큼 서버 구축을 위해 필요한 투자 규모도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다. 강 부사장은 “CXL은 결국 데이터센터를 주도하는 IT 기업들의 총소유비용 (TCO·Total Cost of Ownership) 절감에 가장 공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수많은 데이터의 사용을 보다 경제적으로 만들어 주면서 소비자들 개개인의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현재 SK하이닉스는 상용화를 위해 CPU 기업이나 CXL 컨트롤러 기업과 협업을 통해 성능을 검증하고 있는 단계다”라며 “2023년에는 더 많은 케이스를 확보해 생산성, 제품화 결정에 근거로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객 및 파트너와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유용한 CXL 메모리 응용 및 사용 사례를 많이 함께 발굴해 나갈 예정이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