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영국 런던 로얄가든 호텔에서 개최된 삼성전자 유럽 테크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삼성전자의 2022년형 신제품 네오 QLED 8K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가 프리미엄 TV 최대 시장인 유럽에서 최악의 경우 8K(해상도 7680×4320) TV를 내년부터 판매할 수 없게 된다. 삼성전자는 침체한 전 세계 TV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8K TV를 비롯한 프리미엄 제품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데, 유럽발(發) 친환경 에너지 규제로 TV 사업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8K TV가 시장에 등장한 지 5년이 지난 이후에도 수요가 기대보다 저조한 가운데 최대 시장에서 규제 문제까지 발목을 잡으며 악재가 겹치는 양상이다.

◇ “25일까지 개정 열려있으나 내년 3월 예정대로 시행”

15일 가전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27개 회원국에서 판매되는 TV의 전력 소비 규제를 내년 3월 예정대로 시행할 전망이다. 최근 EU집행위원회는 이탈리아 IT 매체 디지털데이(DDay)에 “오는 25일까지 개정 여지는 있으나, 규제는 기존 계획대로 내년 3월 1일부터 시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유럽에서 판매되는 8K TV는 별다른 규제가 없으나, 내년부터는 4K TV에 적용하고 있는 에너지효율지수(EEI)가 8K TV와 마이크로LED TV에도 확대 적용된다. 강화된 기준에 따르면 8K TV와 마이크로LED TV는 EEI 0.9 이하를 충족해야 한다. 이 기준에 맞지 않는 TV는 유럽에서 판매할 수 없다. 현재 삼성전자의 주력 제품인 네오 QLED 8K 등을 비롯해 시중에 나온 모든 8K TV는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픽=이은현

◇ 8K TV 최대 시장 유럽, 삼성 경쟁력 약화 우려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유럽 시장은 전 세계에서 8K TV가 가장 많이 팔리는 지역으로, 특히 삼성전자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시장조사업체 DDSC에 따르면 지난해 지역별 글로벌 8K TV 출하 비중은 서유럽이 31%로 가장 높았다. 서유럽에서 삼성전자는 LG전자, 중국 TCL, 일본 소니 등을 압도적인 비율로 제치고 수년째 8K TV 출하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서유럽을 포함한 세계 8K TV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 63.1%, LG전자 5.5% 수준이다.

EU의 규제 강화안을 맞추려면 기본 디스플레이 밝기를 줄여 소비전력을 낮추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8K가 자랑하는 초고화질 등의 성능이 저하돼 경쟁력이 떨어진다. 업계 관계자는 “제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밝기를 낮추거나 TV튜너를 빼는 등의 조치로 제품 스펙을 다시 맞추면 되긴 하지만, 차세대 TV로 8K를 강력히 밀고 있는 삼성전자는 여기서 성능을 낮춰버리는 경우 전반적인 TV 사업 대오가 흐트러진다”며 “주력 모델 간 충돌이 발생해 8K 이하 모델 판매 전략까지 연쇄적으로 받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8K 연합은 성명을 내고 “8K 규제가 변경되지 않으면 새 산업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며 “8K TV의 전력 소비 제한이 너무 낮아 어떤 장치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EU집행위원회는 최근까지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새로운 규제가 유럽 시장에서 8K TV를 몰아내진 않을 것이다. 제조사가 기술이나 소프트웨어를 개선하면 유럽 시장에 호환 가능한 TV를 계속 판매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 8K 지원 콘텐츠 거의 없어…수요 호전 난망

전 세계 8K TV 시장 성장세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분위기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 집계 기준 올해 3분기까지 지역별 8K TV 누적 출하량은 북미와 유럽 모두 지난해 3분기와 비교해 각각 13%, 21% 감소했다. 유일하게 중국에서만 출하량이 44.2% 늘었으나 중국 수요는 현지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내세우며 싹쓸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수요가 감소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제조사와 소니 등 일본 제조사 출하량 역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8K TV 수요가 치고 올라오지 못하는 데엔 콘텐츠 부족 탓이 크다. 현재 8K 화질로 볼 수 있는 영상 콘텐츠는 유튜브 내 일부 영상과 지상파 방송 10%가량이 전부다. 넷플릭스와 티빙, 왓챠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도 8K를 지원하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4K가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땐 화질이 전과 비교가 안 된다는 평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보다 해상도가 4배 높은 8K는 일반인 눈으로 볼 때 4K와 사실상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는 반응이 많다”며 “방송국도 수요가 낮은 8K 콘텐츠 제작에 장비 투자 등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지 않아 더더욱 수요가 오르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장 전망도 밝지 않다. 지난해 전 세계 8K TV 판매량은 약 40만대를 기록했는데, 옴디아에 따르면 2026년에도 출하량이 40만대를 넘어서지 못할 전망이다. 2026년 전체 TV 시장에서 8K TV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0.2%에 그칠 것으로 예측됐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발 규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이슈로, 8K TV 시장에는 악재가 겹치고 있는 상태다”며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전 세계 TV 제조사가 모두 영향을 받지만, 특히 8K 라인업이 가장 많은 삼성전자는 TV 사업 전략 구상에 고민이 깊어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