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최대 시장인 미국, 중국, 유럽을 중심으로 재편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 기술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단행하면서 G2인 두 국가의 반도체 공급망이 사실상 완전히 분리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 역시 자기권역 내 반도체 생산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며 중장기적으로는 공급망이 삼분할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3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 수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미국, 중국, 유럽 등 각국의 반도체 업계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비롯해 반도체설계자동화(EDA) 등 첨단 공정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해오던 미 정부가 최근에는 14nm(나노미터·10억분의 1m) 등 구공정 장비까지 제동을 걸었다.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부터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아오던 미국의 이런 방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이 됐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이미 양국의 반도체 생태계의 디커플링(decoupling)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됐으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분석이다.
세계 최대 중고반도체장비 플랫폼인 서플러스글로벌의 김정웅 대표는 조선비즈와 통화에서 "최근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한 반도체 공급망의 분리다"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으로 생태계가 분리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한국 반도체 장비업체들이 수혜를 보고 있기도 하다. 특히 계측·테스트 장비 시장을 거의 독식하고 있는 미국 KLA의 중국 수출이 막히면서 국내의 파크시스템스, 오로스테크놀로지 등 일부 기업들의 중국 매출이 늘어나기도 했다.
반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형 반도체 기업들은 언제 바뀔지 모를 국제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워야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앞서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현지 반도체공장에 대한 수출통제 조치를 1년 유예했지만 이는 공장 업그레이드에 한정된 것으로, 1년 뒤에도 미국 정부가 국내 기업에 건별 허가 면제 조치를 계속 적용할지는 불투명하다.
중국은 제재에 맞서 반도체 자급력을 강화하기 위해 투자를 늘리고 있다. 최근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가 EUV 장비 없이 7nm 공정 기술을 개발했고, YMTC가 128단 3D 낸드를 애플에 인증 받았다. 중국 대표 IT 기업인 화웨이 그룹은 수많은 반도체 기업에 투자하고 있고, 푸젠진화도 D램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최첨단 공정에 대한 접근이 막혔지만 중저가형 디바이스에 채택할 수 있는 기술을 중심으로 내수를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는 중국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추세다. 시장 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SMIC, 화훙그룹, 넥스칩 등 중국 기업들은 올해 1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합산 점유율 10.2%를 기록해 삼성전자(16.3%)에 6.1%포인트 차로 따라붙었다. 중국의 국산 반도체 수요 증가로 중저가 반도체를 만드는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업체)의 실적이 증가하면서 이를 도맡아 생산하는 중국 파운드리 업체들의 실적이 좋아진 것이다.
유럽에서도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 반도체전문지 세미콘엔지니어링이 집계한 2021~2022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유럽 지역 반도체 투자액은 약 487억달러(약 63조원)로 집계됐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이 최근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조성하기로 한 430억유로(약 58조원)를 합치면 121조원 넘는 대규모 투자가 쏟아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