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CEO 등과 함께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글로벌 4대 반도체 첨단 장비업체가 한국 시장 강화에 나선다.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네덜란드 ASML·미국 램리서치·일본 도쿄일렉트론 등이 국내에 연구·개발(R&D)·재제조센터 구축에 나섰다. 이들 업체는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 점유율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만 TSMC 등 외국 기업과 반도체 미세 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업계로서는 필수 협력사로 평가받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장비 제조사에 첨단 장비를 공급받기 위해 수년씩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국내 연구개발센터나 사업장이 신설될 경우 고질적인 반도체 부품 및 장비 공급 부족 문제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 제조시설 확장 가능성 남겨둔 ASML

22일 반도체 업계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초미세 반도체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 제조하는 네덜란드 ASML은 지난 16일 경기도 화성 1만6000㎡(약 4840평) 부지에 ‘뉴 캠퍼스’ 공사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ASML은 2021년부터 오는 2025년까지 총 2400억원을 투자한다. 2024년 완공 예정인 뉴 캠퍼스에는 재제조센터와 트레이닝센터가 들어선다. 재제조센터는 심자외선(DUV)·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폐기 부품을 활용해 현장에서 활용하는 반도체 장비를 수리할 수 있는 시설을 말한다. 트레이닝센터에서는 ASML 직원과 고객사들을 위한 EUV·DUV 노광장비 관련 교육이 진행된다.

ASML 관계자는 “지금까지 장비를 수리하려면 네덜란드 본사까지 보내야 했다”라며 “우선 국내에서 장비를 유지 보수하는 것부터 시작하면서, 향후 한국 업체들이 겪고 있는 부품 및 장비 공급 부족 문제도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뉴 캠퍼스는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공장 인근으로, ASML은 추후 이곳이 장비 제조 시설로 확대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15일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화성 뉴 캠퍼스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향후 한국에서 R&D센터를 늘려나갈 것이다”라며 “사업 기술이 복잡하기 때문에 먼저 재제조센터로 시작하고, 지식 이전에 5~10년이 걸리는데 R&D가 추가되면 제조 기반 확장 여지가 생길 수 있다. 한국은 시작점에 있다”고 밝혔다.

지난 16일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 반도체 클러스터 '뉴 캠퍼스' 기공식에서 ASML 피터 베닝크 CEO와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경기도청 제공

반도체·평판 디스플레이·태양전지 등의 제조 장비 및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업계 1위 AMAT도 지난 7월 경기도에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R&D센터를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업계 3위이자 식각 장비 분야에서 우위를 보이는 램리서치도 지난 4월 경기 용인에 R&D센터인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를 개관했다. 램리서치는 이곳을 최첨단 연구시설로 운영하고 글로벌 R&D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4위 도쿄일렉트론은 지난해 11월 2000억원을 투자해 기존 경기 화성에 있는 반도체 제조장비 R&D센터를 증설하기로 했다. 이번 ASML의 착공에 따라, AMAT·램리서치·도쿄일렉트론까지 글로벌 톱4 장비업체가 모두 한국에 터를 잡게 됐다.

◇ 中 대신 한국 ‘관심’... 장비·부품 공급, AS 빨라지나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계가 한국 시장을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 규제로 ‘큰손’으로 부상하던 중국에 첨단 장비를 납품하기 어려워진 영향이 크다. 사실상 장비 업체들은 핵심 반도체 제조사가 있는 한국과 대만을 대체 투자처로 평가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은 AMAT·ASML·램리서치·도쿄일렉트론 등 4개 기업이 점유율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AMAT이 점유율 18.6%로 1위, ASML이 18.1%로 2위에 이어 램리서치(15%), 도쿄일렉트론(13.4%) 순이다.

국내 반도체 제조사들은 글로벌 4대 장비업체의 국내 사업장 조성을 반기는 상황이다. 국내에 상시 소통을 할 수 있는 거점이 마련됨에 따라, 향후 부품 공급 사이클이 빨라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EUV는 연간 생산물량이 40대 안팎에 불과한데, 이마저 우크라이나 사태와 반도체 공급 부족 등으로 생산 일정이 계속 밀리고 있다. EUV를 적기에 받지 못할 경우 미세공정 경쟁에서 뒤처지기 때문에 업체 사이에서는 이를 먼저 공급 받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하다.

그래픽=손민균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역시 기존 EUV 장비부터 현재 개발 단계에 있는 차세대 노광 장비 ‘하이 렌즈수차(NA) EUV’를 주문하고 공급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이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대만 TSMC는 EUV 장비를 100대 이상 확보했으나 삼성전자는 30대 안팎, SK하이닉스는 2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그간 분위기를 보면 하이 NA EUV는 2026년은 돼야 국내 업체에 들어올 것 같고 EUV 장비 역시 TSMC 등 경쟁사로 넘어가는 물량이 워낙 많아 대기 시간이 길었다”며 “ASML의 화성 캠퍼스 조성을 계기로 EUV 장비도 경쟁사보다 빨리 받아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일본의 장비와 소재 없이는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라며 “글로벌 장비업체들의 국내 진출로 기술 인재 양성 등이 활발히 이뤄진다면 대기업뿐 아니라, 나아가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의 경쟁력도 한 단계 도약할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