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과 퀄컴의 반도체 설계 지식재산권(IP) 관련 소송전으로 애꿎은 삼성전자가 피해를 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은 이번 소송을 계기로 2024년부터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 등에 반도체 설계 IP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글로벌 모바일 칩 95% 이상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ARM의 설계 독점 우려로 애플과 인텔은 ARM 설계가 아닌 오픈소스 기반의 RISC-V(리스크 파이브)로 설계를 옮기려고 한다. 삼성전자 역시 이런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ARM은 퀄컴과 자회사 누비아를 상대로 라이선스 침해 소송을 지난 8월 미국 델라웨어 주 법원에 제기했다. 퀄컴 역시 ARM이 부당한 소송을 제기했다며 반소를 한 상태다.

누비아는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용 A시리즈 칩을 설계한 엔지니어가 2019년 설립한 반도체 스타트업으로, 데이터센터용 중앙처리장치(CPU) 등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누비아는 ARM 설계 라이선스를 활용해 왔다. 그러다 설립 2년 만인 지난해 1월 퀄컴에 인수됐다. 퀄컴은 누비아의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통신 칩 외에도 증강현실(AR), 자율주행 등으로 칩 생태계를 확장하려고 했으나, ARM이 제동을 걸었다.

ARM 측은 “퀄컴이 누비아를 인수했지만, ARM 승인 없이는 누비아 라이선스를 사용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누비아가 퀄컴에 인수된 뒤에는 ARM 라이선스 계약을 다시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퀄컴 측은 “ARM과 퀄컴은 오랜 기간 협력을 유지했으나, 계약에 의해서든 아니든 퀄컴 또는 누비아의 기술 개발을 방해할 권리가 없고, ARM의 이번 소송은 퀄컴이 확립해 온 자체 CPU 기술 라이선스를 무시하는 행위다”라고 반박했다.

최근 공개된 ARM이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ARM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24년부터 퀄컴을 포함한 팹리스에 설계 IP 라이선스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또 라이선스 비용을 조정하고, 기기 제조사에만 라이선스를 제공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ARM 외 다른 회사의 IP를 혼합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다.

삼성전자 엑시노스 2200. /삼성전자 제공

ARM이 계획 중인 반도체 설계 IP 라이선스 체계 개편은 전 세계 반도체 업계에 충격을 줬다. ARM의 설계 IP는 시스템반도체의 40%, 모바일 칩의 거의 전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퀄컴은 물론이고 대만 미디어텍, 삼성전자 역시 ARM 정책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경우 올해 초 선보인 플래그십(최상위) 모바일 칩 엑시노스2200의 CPU에 ARM 설계를 활용했다. 그러면서 AMD의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자사의 신경망처리장치(NPU)를 결합했는데, ARM의 새 정책대로라면 이런 조합을 앞으로 할 수 없다. 2024년부터는 모두 ARM 설계를 쓰던가, 아예 ARM 설계를 쓰지 않아야 하는 셈이다. GPU의 경우 이전 엑시노스에 사용한 ‘말리’를 다시 쓰면 되지만, NPU 등은 현재 대안이 없다. 또 삼성전자는 애플이나 퀄컴, 미디어텍에 비해 상대적으로 칩 설계 능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고 있어 기술 역량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애플도 현재 아이폰 등에 사용한 A시리즈 칩과 노트북 등에 적용 중인 M시리즈 칩을 ARM 설계 기반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점차 오픈소스 방식 설계인 RISC-V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RISC-V는 2010년 미국 UC버클리가 개발한 것으로, 누구나 이 설계를 기반으로 소프트웨어와 프로세서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다. 다만 아직 ARM 설계에 비해 성능이 낮고, 상용화하기도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이 아이폰13 시리즈와 2세대 아이폰 SE 등에 장착하고 있는 A15 바이오닉 칩셋 개념도. /애플 제공

인텔 역시 탈(脫)ARM을 위해 10억달러(약 1조3300억원)를 투자해 RISC-V 생태계 조성에 나섰다. 이미 이를 기반으로 한 니오스(Nios)V 칩셋을 공급하고 있기도 하다. 인텔의 RISC-V 투자는 인텔파운드리서비스가 주도한다. 인텔 측은 “더 많은 RISC-V 제품을 지원받고 싶어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고객의 요구를 확인했다”고 했다. 인텔은 SK하이닉스와 사우디 국영 에너지회사인 아람코가 투자하고 있는 RISC-V 기술 개발 기업 ‘사이파이브’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 사안의 본질은 ARM이 IP 라이선스 비용을 높이고 싶어하는 데 있고, 이번에는 퀄컴을 걸고넘어졌지만 ARM IP를 사용하는 삼성전자, AMD, 엔비디아 등에 모두 보내는 경고장 같은 것이다”라며 “ARM이 라이선스 정책을 바꿨을 때 미치는 반도체 업계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팹리스를 비롯한 반도체 업계는 ARM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오픈소스 기반 RISC-V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