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기흥반도체 공장에서 직원들이 웨이퍼의 회로를 검사하고 있다. /조선DB

글로벌 경기 침체로 전자기기(IT) 수요가 줄어들면서 공급 과잉 늪에 빠진 메모리반도체 업계가 잇따라 투자 감축과 감산(減産)을 선언하고 나섰다. 하지만 메모리 업계 1위 삼성전자는 생산량이나 투자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대신 차세대 공정 양산에 집중하는 초격차 전략으로 시장 장악력을 더욱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두가 투자를 망설일 때 과감한 투자로 더 앞서가겠다는 것이다.

1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메모리 세계 2위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주요 업체들은 단기간 내에 시장 상황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올해 말부터 내년 설비 투자를 축소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앞서 협력사에 발주한 설비 물량 중 50% 이상을 철회하는 등 애초 계획했던 설비 투자를 대폭 줄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7월 노정원 SK하이닉스 사업담당 사장은 "재고 수준이 높아져 내년 캐팩스(CAPAX·자본적지출, 시설 투자 등을 의미)를 상당폭 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지난 몇 년간 반도체 업계는 설비 투자를 대폭 늘리면서 코로나19 특수로 폭증한 반도체 수요에 대응해 왔다. 이 결과 올해 메모리 생산능력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D램 생산능력은 1988만장으로 지난해(1781만장)보다 약 12% 늘었다. 낸드플래시 역시 2057만장에서 2171만장으로 5% 늘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특수가 끝나고 인플레이션 등으로 소비 심리가 위축하면서 시장에 메모리 재고가 넘쳐나는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는 손실을 감수하고 생산량 조절과 비용 감축을 불황 타개책으로 내놓고 있다.

메모리 세계 3위 미국 마이크론 역시 애초 계획한 장비 투자안에서 30%를 삭감해 공급 과잉에 대응하기로 했다. 웨이퍼(반도체 원판) 제조 장비 투자도 50% 줄여 생산량 조절에 나섰다. 낸드 2위인 일본 키옥시아도 이달부터 웨이퍼 투입량을 30% 줄인다고 밝혔다. 이 밖에 난야테크놀로지 등 대만 D램 기업은 이번 4분기부터 감산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업계가 공급 조절에 나서면서 내년 D램과 낸드 공급 과잉률은 예상치인 10%대에서 5%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주요 업체들이 감산과 투자 축소를 선언한 가운데, 메모리 1위 삼성전자는 생산과 투자를 호황 때 예정한 대로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위기를 투자 등으로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한진만 삼성전자 부사장은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에서 열린 '삼성 테크데이 2022′에서 감산 계획을 묻는 말에 "우리는 당장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예정된 경로를 쉽게 바꾸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수십년간 인위적 감산이나 투자 철회는 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해왔으므로 이번에도 그 방향을 따라간다고 보면 된다"면서 "메모리에서는 원가 경쟁력이 있으니 경쟁사들의 투자 축소나 감산 움직임에도 꿋꿋이 투자를 늘릴 수 있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지난 5일(현지시각) 미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삼성 테크 데이'에서 이정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사장)이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는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선단공정(미세공정)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른바 '초격차 전략'을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삼성이 내년 5세대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D램을 양산하기 시작하면 현재 4세대 14㎚급 D램을 생산하고 있는 경쟁사를 따돌리고 시장 점유율을 더욱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최근 적층 경쟁이 한창인 낸드 분야에서도 경쟁사를 압도할 기술을 선보인다. 삼성전자는 2024년 9세대 V낸드를 양산하고 2030년까지 1000단 V낸드를 개발한다고 전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사무국장은 "전 세계 반도체 업계 경쟁이 심화하고 있지만 삼성전자처럼 세계 1위를 하는 분야에 더 집중해 투자를 늘리는 등의 전략으로 초격차를 유지하는 게 답일 수 있다"고 했다. 또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감산 행렬에 올라타지 않으면서 얻을 수 있는 반사이익이 적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반도체 기업을 필두로 벌어지는 메모리 최저 가격 공급과 생산량 조절 등의 경쟁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기술 초격차에 집중해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 삼성전자의 점유율을 공고히 하는 데 득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