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침체, 재고 증가 등으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고 있지만, 유독 자동차 분야만 고속 성장이 예고되고 있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등 신(新)시장이 열리면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이 분야 역량을 키우기 위한 기업 간 경쟁도 본격화되고 있다.

12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내년 메모리반도체인 D램 시장 규모(매출 기준)는 올해 전망치인 903억달러(약 129조원)에서 16% 줄어든 759억달러(약 109조원)로 예상된다. 시장 규모가 약 20조원 줄어드는 것이다. 이 시장 점유율 약 75%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의 매출도 96조원 수준에서 81조원 수준으로 15조원 가량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SK하이닉스 18㎇ LPDDR5 모바일 D램. /SK하이닉스 제공

낸드플래시 시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내년 낸드 시장은 올해 전망치인 720억달러(약 103조원)에서 겨우 3.7% 오른 746억원(약 107조원)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낸드 시장이 전년과 비교해 20% 이상 성장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 기업은 이 시장에서 약 54%의 점유율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합산 매출은 올해 약 55조원에서 57억원으로 소폭 상승할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시장의 어려움으로 D램과 낸드 등 메모리반도체 전체에서 내년 10조원 이상 매출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반도체 업계는 시장 불황으로 시설 투자 규모도 줄이는 중이다. 트렌드포스는 내년 낸드 분야 시설투자 금액을 310억달러로 예측했는데, 이는 올해 대비 겨우 2% 증가한 것이다. 이마저도 대부분은 중국 쪽 투자여서 실제 업계 선두권 업체들은 모두 투자를 줄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SK하이닉스가 장비 발주 업체 등에 내년 발주 물량을 줄이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만큼 디스플레이 시황도 좋지 않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올해 디스플레이 전체 시장 매출은 전년 대비 15% 줄어든 1331억8000만달러(약 190조9500억원)로 전망된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액정표시장치(LCD) 약진으로 디스플레이 시장 매출은 2020년 14%, 2021년 26%로 전년과 비교해 늘었는데, 현재 시장 상황은 이와 반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직원이 LCD 생산라인에서 패널 점검 중이다. /삼성디스플레이 제공

매출 감소폭이 가장 큰 분야는 LCD TV용 패널이다. 올해 매출이 전년 대비 32% 급감한 258억달러(약 36조9920억원)에 그쳤다. 수요 면적은 전년에 비해 2% 늘었지만, 패널 단가가 하락하면서 매출도 축소됐다. 디스플레이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모바일 패널도 올해 매출이 전년과 비교해 8% 감소한 437억달러(약 62조6800억원)로 예측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중화권 스마트폰 출하량 감소에 영향을 받았다. 모바일 PC(노트북, 태블릿 등)와 모니터 패널 매출 역시 전년 대비 각각 15%, 2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가 동반 부진에 빠졌지만, 자동차 분야만큼은 성장이 예상된다. 관련 업계가 해당 분야 역량 강화에 팔을 거둬붙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지난해부터 2026년까지 자동차 반도체 시장이 연평균 13.4% 성장한다고 관측했다. 시장 비중도 점점 확대되는 추세로, 지난해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자동차 분야는 7.4%, 올해 8.5%, 2026년 9.9%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반도체는 지난 2020년부터 업계의 수요 예측 실패로 구형(레거시) 공정으로 만드는 마이크로컴포넌트유닛(MCU) 등이 품귀 현상을 빚으면서 귀한 몸이 됐다. 비슷한 공정으로 생산되는 전력반도체(PMIC) 등도 품귀를 빚었다. 자동차 회사는 원하는 만큼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해 자동차 수요 회복에도 차를 더 생산할 수 없었다. 일부 회사는 반도체 내재화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동차 반도체 특유의 높은 진입장벽으로 기존 반도체 제조사의 지위만 더 올라갔다.

아우디 A8 자동차 한 대에 사용되는 차량용 반도체.

자동차 반도체는 기존 수요에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수요까지 만들어지는 중이다. 기존 동력계나 전자장비(전장)용 반도체 외에도 20개 이상의 특수 센서와 여러 위성항법장치(GPS)용 반도체,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첨단 메모리반도체, 중력 및 가속도 센서, 5세대 이동통신(5G)용 칩, 이미지센서(CMOS) 등 현존 모든 종류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현재 만들어지는 일반 내연기관차에 300~400개의 반도체가 사용된다면, 전기차 시대에는 1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장착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다. 옴디아는 내년 자동차 디스플레이 시장 규모를 최근 기존 88억달러(약 12조6200억원)에서 95억달러(약 13조6300억원)로 8% 상향조정했다. 이는 이 시장 성장이 기존 전망보다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옴디아 설명이다. 자동차 디스플레이 시장 규모는 오는 2024년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애초 자동차 디스플레이는 일본과 대만 업체들이 주도해왔다. 그러나 LG디스플레이가 업계 1위로 올라서면서 지금은 한국이 시장을 이끌고, 중국 업체가 추격하는 형태가 됐다. 옴디아가 집계한 10인치 이상 자동차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 1위는 LG디스플레이가 19.7%로 1위, 중국 BOE 19.7%, 일본 샤프 14.2% 순이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이 분야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시장 점유율은 미미하다.

디스플레이 시장도 전기차 및 자율주행 시대에 맞춰 대형화가 이뤄지고 있다. 더 크고 밝은 화면을 찾는 요구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10인치 이상 디스플레이는 LG디스플레이 자동차 매출의 절반을 넘었고, 자동차 OLED 시장 역시 LG디스플레이가 91%로 1위를 달리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