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P1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 협력체 ‘칩4(한국·미국·일본·대만)’가 예비 실무 회의를 열고 첫발을 내디뎠다. 칩4에 중국이 배제된 상황에서 중국 사업 비중이 높은 국내 반도체 업계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29일 외교부와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 28일 한국과 미국, 일본, 대만의 국장급 실무자들이 화상으로 모여 첫 예비 회의를 열고 넓은 범위에서 협력체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장비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고,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분야, 대만은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 일본은 소재·장비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이들이 협력하면 중국을 견제하는 동시에 반도체 공급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향후 본회의 참석 여부에 대해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업계에서는 본회의 참석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 “中 중요 고객 많은데, 정부 주도라 대응 부담”

협의체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업계 ‘큰손’인 중국과 대중(對中) 견제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미국 사이에서 여전히 난감해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당분간 중국 내 라인 증설 및 설비 교체 계획을 세우는 건 어렵게 됐다”면서도 “중국엔 중요 고객사들도 많고, 오랜 기간에 걸쳐 중국 내 설비 투자를 해왔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게 쉽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회의에서 협의 사항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 그에 맞는 대응책을 세울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 주도의 국가 간 협의체로 진행되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대응하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다”라며 “협의체에서는 우선 공급망 다변화와 연구·개발 협력, 투자 인센티브 제공 등에 대해 논의한다고 하는데 어떤 대중 제재가 추가될지 알 수 없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 있는 신관기술 반도체 공장. /조선DB

◇ ‘큰손’ 中은 한국 압박

그 사이 중국은 관영매체를 동원해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한 기업들이 중국 시장을 포기하긴 어렵다”며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중국 점유율을 낮추면 세계 경쟁력 또한 하락할 것이다. 칩4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하나의 이론 수준이다”라고 지난 26일 보도했다. 앞선 논평에서는 “한국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면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앞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한국도 이러한 산업 발전 방향에 집중하길 기대한다”고 했다.

실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매출 상당 부분을 중국 수요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반도체 수출액 1280억달러(약 180조원)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금액은 502억달러(약 71조원)로 40%에 육박한다. 여기에 홍콩으로 수출되는 물량을 합하면 62%에 달한다.

수요뿐 아니라 반도체 생산 역시 중국 의존도가 높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공장에서 낸드플래시 전체 출하량 중 약 40%를 생산하고 있고, 쑤저우에서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 중이다. SK하이닉스도 D램 생산의 약 50%를 중국 우시 공장에서 만들고 있고, 지난해 인텔로부터 인수한 낸드플래시 공장도 중국 다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반도체 미세 공정의 핵심인 극자외선(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고,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14㎚(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생산 장비의 수출 금지 조치도 검토 중이다. 이에 관련 업체들은 “당장은 중국 공장을 기존대로 기동할 방침이지만, 투자는 미국과 국내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 내 대규모 공장 건설에 착수했으며 신규 증설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 “이율배반적인 美에도 대응 필요”

업계 안팎에서는 국내 반도체 우려 사항을 칩4 회의에서 논의하는 등 한국이 적극적으로 협의체를 활용해 실익을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경제안보팀장은 “한국 기업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조치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며 “최근 애플이 중국 반도체 업체 YMTC와 납품 계약을 맺은 사례처럼 자국 기업에는 관대한 미국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논의해 공정한 시장이 조성되게끔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원천 기술과 장비에서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는 부분도 크기 때문에 이들과의 협력도 필요하다”며 “동시에 미국이 자국의 반도체 정책을 상세히 공유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도 논의되어야 윈-윈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중국 반도체 기업이 막대한 국가 지원금을 등에 업고 저가 물량을 풀면서 치킨 게임을 벌이는 상황을 막을 방안을 논의하는 등 우리도 적극적으로 칩4 협의를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