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글로벌 인쇄회로기판(PCB) 시장에서 대만 기업이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 상위 10개 업체 중 대만 기업이 5개나 포함된 것이다. 반면 한국 기업은 1곳도 상위 업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첨단 반도체 패키지 기판으로 알려진 플립칩(FC)-볼그리드어레이(BGA)에 1조원 이상의 투자를 진행, 대만 기업을 빠르게 추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23일 PCB 시장조사업체 N.T.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지난해 PCB 시장은 대만 젠딩(ZDT)이 가장 많은 매출(56억900만달러·약 7조8300억원)를 기록했다. 이어 대만 유니마이크론이 37억8300만달러(약 5조2800억원)로 2위를 차지했다. 젠딩은 연성회로기판(FPCB), 유니마이크론은 반도체(IC) 기판이 주력으로 전년 대비 매출이 각각 18.1%, 19% 늘었다.
또 다른 대만업체인 컴팩과 트라이팟은 지난해 각각 22억8100만달러(약 3조700억원), 22억7900만달러(약 3조1800억원)의 매출로 나란히 5, 6위에 올랐다. 한스타보드(대만) 또한 20억6200만달러(약 2조8700억원)로 전년 대비 24.7% 매출이 상승하며 10위에 이름을 새겼다. 대만 기업은 매출 상위 10개 기업 중 절반을 차지했다.
일본 기업은 연성인쇄회로기판(FPCB)과 자동차용 PCB에 주력하는 일본맥트론이 지난해 29억4400만달러(약 4조1100억원)로 4위, 반도체 패키지 기판 강자인 이비덴이 21억7400만달러(약 3조350억원)로 9위에 올랐다. 미국 TTM테크놀로지는 22억4900만달러(약 3조1400억원)로 7위, 중국 선난써키트(21억7800만달러·약 3조400억원)가 9위를 기록했다.
한국 기업은 한 곳도 매출 상위 10개 업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탓이다. 삼성전기가 지난해 16억6900만달러(약 2조3300억원)의 매출로 14위인 것이 최고 순위다. 지난해 삼성전기는 같은 회사 조사에서 10위에 올랐는데, 올해는 순위가 4계단 밀렸다. 매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7.6%에 그쳤다. FC-BGA 등 첨단 기판에 집중하기 위해 경연성회로기판(RFPCB) 시장에서 철수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어 RFPCB를 만드는 인터플렉스와 PCB를 생산하는 코리아써키트가 소속된 영풍그룹이 지난해 매출 14억8700만달러(약 2조750억원)로 17위, 반도체 패키지 기판이 주력인 LG이노텍이 19위(13억8200만달러·약 1조9300억원)로 나타났다. LG이노텍의 경우 매출 순위 30위권의 평균 매출 성장률인 20.4%를 넘는 26.2%의 성장을 보였다.
지난해 글로벌 PCB 생산 규모는 960억달러(약 134조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대만이 288억달러(약 40조2000억원), 중국이 276억3400만달러(약 38조5700억원)를 담당했다. 각각 점유율 32.8%, 31.3%로 중화권 합산 64.1%에 달한다. 특히 중국의 경우 대만 기업의 생산 기지가 있어 명실상부 세계 최대 규모의 PCB 생산국이다. 나카하라 하야오 N.T.인포메이션 최고경영자(CEO)는 “대만의 중국 생산, 중국 기업의 성장 등으로 중국 PCB 생산량은 대만의 성장을 앞지르고 있다”라며 “대만과 중국의 생산 격차는 앞으로 더욱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일본은 151억7400만달러(약 21조1800억원), 한국은 95억9400만달러(약 13조3932억원)에 그쳤다.
다만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PCB 중에서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인 FC-BGA를 중심으로 체질 개선에 나선다. 앞으로 매출 순위 역시 크게 뛰어오를 가능성이 크다. FC-BGA는 여러 반도체를 얹는 작은 판이다.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한 판에 올리고 각 반도체를 전기회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5세대 이동통신(5G), 인공지능(AI), 고성능컴퓨팅(HPC) 분야 발달로 대량의 정보 처리가 필수인 통합칩(SoC) 구성을 위해선 FC-BGA가 필수다. 미세 회로를 통해 전기 신호를 빠르게 전달하면서도 신호 전달에 따른 손실은 적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지난해 PCB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인 분야는 FC-BGA가 포함된 반도체 패키지 기판이다. 10억달러 이상 매출을 기록한 회사는 유니마이크론(20억8000만달러, 대만), 이비덴(19억6000만달러, 일본), 삼성전기(15억3000만달러, 한국), 신코덴키(13억9000만달러, 일본), LG이노텍(12억7000만달러, 한국), 난야(12억3000만달러, 대만), 킨수스(10억9000만달러, 대만)다. 지난해 IC 패키지 기판의 시장 총규모는 156억달러에 달한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뒤늦게 이 시장에 뛰어들긴 했지만, 높은 투자와 기술력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장 기술 난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서버용 기판 시장에서 삼성전기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안으로 서버용 FC-BGA를 양산해 고객사에 공급하는데, 공급 계약 규모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고객사는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점유율이 높은 기업으로, 연말 새로운 서버용 CPU에 삼성전기의 FC-BGA를 결합하려고 한다.
애플 또한 삼성전기의 주요 고객사 중 하나다. 애플 반도체 설계 사업부인 애플 실리콘이 만든 노트북 및 PC용 칩인 M1의 기판을 삼성전기가 만들고 있다. 또 최근 맥북 에어와 맥북 프로에 장착된 M2 칩도 삼성전기 기판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는 FC-BGA 분야에만 지난해와 올해까지 총 1조9000억원을 투자했다. 베트남과 부산사업장의 역량을 높여 이 시장 점유율을 더 높이겠다는 게 삼성전기의 의도다.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삼성전기) FC-BGA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며 “최근 북미 CPU 고객사의 서버용 FC-BGA를 생산해 공급을 진행하고, 애플 M2 프로세서용으로 기판을 공급하는 등 고부가 영역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실적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했다.
애플은 현재 개발 중인 자율주행 전기차 애플카(가칭)의 두뇌에도 한국 기업의 FC-BGA를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혜 기업으로는 LG이노텍이 꼽힌다. LG이노텍은 애플 아이폰의 카메라모듈 최대 공급사로, 업계는 FC-BGA 역시 LG이노텍이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LG이노텍은 1조4100억원을 FC-BGA 등에 투자한다. LG이노텍은 FC-BGA와 공정 유사성이 높은 시스템패키지(SiP)기판, 안테나패키지(AiP)기판 세계 1위 사업자로, FC-BGA에서도 금방 영향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박 연구원은 “반도체 기판 부문의 포트폴리오가 모바일 중심에서 벗어나 PC, 서버 및 네트워크, AI, 자율주행 분야로 다각화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라며 “FC-BGA 시장 참여가 2024년부터 LG이노텍의 매출 증가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