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폰에 도착한 스팸 문자의 모습 /조선DB

#주부 박소영(40)씨는 최근 어린 두 자녀를 위한 키즈폰을 개통하면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유심칩을 꼽고 전화를 개통한 뒤 잠시 스마트폰을 책상에 올려둔 사이, 아이가 전화가 왔다면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건네받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대출을 알선하겠다는 스팸 전화였다. 불과 전화를 개통한 지 3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칫 해외에서 전화가 오는 스팸 전화였다면 요금 폭탄을 맞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둘째의 아이의 스마트폰에는 2~3시간 간격으로 “전화좀줘라”라는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왔다.

#직장인 김정민(54)씨는 스마트폰을 개통하면서 롱텀에볼루션(LTE)형 스마트워치를 함께 구입했다. 이 스마트폰은 유심칩이 장착돼 있어 일반 스마트폰처럼 번호를 부여 받는다. 문제는 밤마다 알 수 없는 번호로 욕설과 함께 돈을 갚으라는 메시지가 온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스마트워치에 사용된 전화번호의 전 사용자에게 보내는 전화나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오고 있던 것이다. 이씨는 고객센터에 항의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만 돌아왔다.

국내 이동통신 가입 회선이 7500만개을 넘어서면서 번호 변경으로 인한 이용자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 ‘010′ 이동전화 번호 자원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번호를 찾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새롭게 휴대전화를 개통하거나 번호를 변경하더라도 스팸 전화·문자에 노출되고 있다. 심지어 이전에 번호를 사용하던 이용자와 관련된 전화나 메시지로 불쾌한 상황에 빠지거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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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통과 동시에 쏟아지는 ‘스팸’

26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통신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국내 이동통신 가입회선은 7512만4746개로 집계됐다. 지난달 기준 국내 인구수는 5157만명으로 1인당 1.5대의 이동전화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스팸에 노출된 번호가 많고 번호를 돌려 사용하면서 번호의 새로운 이용자가 이전 사용자에게 오는 전화나 문자 등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통신서비스 주무 부처인 과기정통부와 통신사는 책임을 떠넘길 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실제 맘카페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고통받고 있다는 목소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학부모는 아이의 문자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는 사연을 공유하기도 했다. 새로 구입한 자녀 폰에 “아빠 나야 바뻐? 내폰 고장 나서 통화 안 돼 잠시 임시번호 사용 중이야. 부탁할 거 있어서 그러는데 문자 확인하면 여기로 답장 줘~”라는 피싱 메시지가 와있던 것이다.

또 다른 회원은 자녀에게 새로 사준 스마트폰에 성인 광고와 도박 광고가 와있어서 화가 났다는 얘기를 커뮤니티에 남겼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커뮤니티 회원들 대부분은 고객센터 등 여러 방면으로 해결책을 알아봤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만 들었다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개인정보 유출 문제도 심각하다. 이전 사용자가 카드사, 유료 케이블 방송 등에 가입했거나 홈쇼핑 등에서 상품을 구입했을 경우, 관련 정보들이 전화나 문자로 오면서 이름, 거주지, 나이 등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호 이전 사용자에게 보낸 문자. 문자에는 이름, 주소 등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조선DB

단순한 광고 스팸은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번호의 이전 주인이 악성 채무자이거나 범죄에 연루됐을 경우, 밤낮없이 울리는 알림에 불쾌할 수 있다. 또다시 번호를 바꾼다고 해도 스팸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수년째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지만, 정부나 통신사 모두 손을 놓고 있다. 지난해 개인정보위원회는 이동통신 사업자로부터 사용이 중단된 휴대전화 번호 리스트를 받아 공공·금융기관, 대형 온라인 쇼핑몰 등에 문자 발송을 중단하라고 알리는 이른바 ‘휴대전화 번호 현행화 사업(가칭)’을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신사 협조, 예산 확보 등의 문제로 사업 추진이 취소됐다.

문제는 다음 달 1일부터 ‘e심’ 제도가 시행될 경우, 이러한 문제가 더욱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e심이 도입되면 대리점에 갈 필요 없이 QR코드 등으로 쉽게 전화를 개통하는 등 1대의 스마트폰으로 번호 2개 사용이 가능해지면서 스팸에 노출될 가능성도 커졌다. 특히 번호 자원 부족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

◇ 정부-통신사, 책임 공방에 이용자만 피해

현재 이동통신 3사는 기존 번호의 변경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해지나 변경 후 28일 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새로운 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해지나 번호이동 등으로 기존 번호를 반납받으면 28일간 이른바 ‘에이징’을 거친 뒤 29일째부터 이용자에게 번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8일간의 에이징만으로 이전 사용자에게 오던 연락이 끊기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일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은 번호 이동 후 겪는 스팸 문자와 이전 번호 사용자에게 보내지는 사적 연락을 줄이기 위해 통신사의 ‘사전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지된 전화번호의 재공급 기간을 현행 28일보다 늘리고, 전화번호 재공급의 경우 이용자 보호를 위한 통신사의 ‘기술적 조치’를 강제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통신사는 난색을 보이고 있다. 기술적 조치가 사실상 어렵고 전체적인 스팸 번호 관리보다 이용자 개개인의 스팸 차단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또 통신사들은 전화번호 재사용 금지 기간을 늘리면 전화번호 부족 문제가 심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020′ 등 새로운 식별번호를 도입하는 것이 스팸 방지에 더 유리하다는 게 통신사 주장이다.

서울 시내 한 이동통신사 대리점의 모습. /연합뉴스

실제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 중 약 82%는 이미 사용 중인 상태다. 미사용 번호 중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전화번호’는 통신 3사를 합쳐도 1%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99% 이상의 번호가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중고 번호라는 의미다.

통신사 관계자는 “번호변경으로 인한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전화번호를 차단하는 것밖에 없다”며 “유한한 번호자원을 불편 없이 쓸 수 있도록 정부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했다.

반면, 과기정통부는 새로운 식별번호는 아직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이전 가입자에게 오는 전화·문자와 마케팅용이나 무작위로 뿌려지는 스팸 전화·문자의 문제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며 “이전 가입자의 문제는 에이징 기간을 늘려 해결할 수 있지만, 스팸은 딱히 막을 방법이 없다”라며 “현재로서는 새로운 식별번호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기존 번호의 에이징 유예기간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고 통신사들의 의견을 듣고 있는 상태다”고 했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이전 가입자 전화·문자나 스팸 문제는 이미 오래된 얘기인데 정부와 통신사의 핑퐁 싸움에 아무런 대책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며 “최근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스마트워치나 사물인터넷(IoT), 자동차까지 번호를 부여하는 시대에서 번호자원 부족 문제에 대해 신속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 사무총장은 “먼저 소비자가 번호를 결정할 때 자신의 번호가 어떤 용도로 활용됐고 사용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 대략적인 정보를 제공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도 필요할 것 같다”며 “특히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미성년자 가입자에는 사용하지 않은 이른바 클린번호를 부여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