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규모의 토종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이 탄생했다. CJ ENM과 KT가 각 사 OTT 플랫폼인 티빙과 시즌의 합병을 공식 발표하면서다. 양사 합병이 글로벌 1위 넷플릭스가 장악한 국내 OTT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을지 주목된다.
CJ ENM과 KT는 지난 14일 각각 이사회를 열고 티빙과 시즌의 합병안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양사는 티빙이 시즌을 흡수하는 형태로 오는 12월 1일까지 합병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현재 희석주 기준 티빙의 1·2대 주주는 CJ ENM과 스튜디오룰루랄라(옛 JTBC스튜디오)이며, 시즌의 지분을 100% 보유한 KT스튜디오지니는 추후 통합 법인의 지분을 취득해 3대 주주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양지을 티빙 대표이사는 "티빙과 시즌의 만남은 최근 글로벌에서 위상이 강화된 K-콘텐츠 산업의 발전과 OTT 생태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함이다"라며 "양사의 콘텐츠 제작 인프라와 통신 기술력을 통해 국내를 넘어 '글로벌 1위 K-콘텐츠 플랫폼'으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윤경림 KT그룹 트랜스포메이션부문장은 "글로벌 OTT의 각축장이자 핵심 콘텐츠 공급원이 된 국내 미디어∙콘텐츠 시장에서 보다 신속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이번 통합을 결정하게 됐다"며 "앞으로 KT그룹은 미디어 밸류체인을 활용한 콘텐츠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고 CJ ENM과 협업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티빙과 시즌의 합병으로 국내 OTT 시장에는 지각 변동이 예고됐다. 애플리케이션(앱) 데이터 분석 플랫폼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넷플릭스·웨이브·티빙·쿠팡플레이·디즈니플러스·시즌·왓챠 등 국내외 주요 OTT 7개 플랫폼의 지난달 월간활성이용자(MAU)는 2746만명으로 집계됐다. 넷플릭스가 1117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SKT가 지상파 3사와 연합해 만든 웨이브(423만명), 티빙(401만명), 쿠팡플레이(373만명), 디즈니플러스(168만명), 시즌(156만명), 왓챠(108만명)가 이었다. 즉, 현재 3·6위를 기록 중인 티빙과 시즌이 합쳐지면 단숨에 웨이브를 제치고 2위(557만명) 자리에 오를 '신예'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간 국내 OTT 업계에서는 '공룡' 넷플릭스를 견제하기 위한 토종 플랫폼 간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대부분 토종 플랫폼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다. 특히 티빙은 지난해 10월 독립 출범 1년을 맞아 연 기자 간담회에서 다른 OTT 플랫폼과의 합병이나 협력은 검토하지 않고 있으며, 물리적으로도 업체 간 통합은 어려워 보인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그랬던 티빙이 1년도 채 안돼 시즌과 합병을 결정한 것은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전환 이후 국내 OTT 시장이 둔화하는 상황에서 기존 가입자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려면 이전과 다른 전략을 짜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CJ ENM이 KT 이동통신 서비스에 가입한 1800만 이용자의 스마트폰에 티빙 앱을 기본으로 탑재하는 방안을 채택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일각에선 CJ ENM이 IPTV '올레 tv,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 케이블TV 'HCN' 등 KT의 1300만 유료방송 가입자를 확보하기 위해 셋톱박스에 티빙 앱을 탑재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KT로서는 이미 경쟁에서 뒤처진 OTT 플랫폼에 힘쓰기보다는 KT스튜디오지니의 지식재산권(IP)을 티빙에 제공하는 게 유리하다고 봤을 수 있다. 티빙과 시즌이 합병하면 자사 ENA와 인터넷(IP)TV 올레tv를 넘어 CJ ENM의 tvN을 통해서도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CJ ENM과의 콘텐츠 협력 또한 KT 입장에선 이득이다. 티빙은 지난달 아시아 최초로 글로벌 미디어그룹 파라마운트의 OTT '파라마운트플러스'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등 플랫폼 확대에 공을 들여온 데다, 지난 2월에는 2500억원 규모의 외부 투자 유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업계는 티빙과 시즌의 합병을 시작으로 국내 OTT 시장에 플랫폼 간 합종연횡 바람이 불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적자를 기록 중인 토종 플랫폼이 많은 상황에서 첫 사례가 나온 만큼 두 번째, 세 번째 사례가 뒤를 잇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란 설명이다. 지난해 558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웨이브의 이태현 대표는 올해 초 '디지털미디어 콘텐츠 진흥포럼'에 참석해 "드라마 한 편당 제작비가 15억~16억원까지 올라 투자금을 회수하고 재투자하는 선순환이 불가능해졌다"며 "실적을 생각하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OTT 이용자들은 1명당 평균 2.7개의 OTT를 사용 중이다. 한 국내 업계 관계자는 이를 두고 "플랫폼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저마다 제공하는 콘텐츠는 달라서 피로감을 느끼는 이용자가 많다"며 "서비스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플랫폼끼리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 있어왔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다양한 목적에서의 인수합병(M&A)은 어느 업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라며 "OTT 업계의 경우 콘텐츠 제작 역량 확대를 위한 검토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