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단편 영화 '일장춘몽'의 한 장면. 박 감독은 이 장면을 브이에이코퍼레이션의 버추얼 스튜디오 '브이에이 스튜디오 하남'에서 촬영했다. /애플 제공

“배우와 감독 모두에게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배우들은 자기가 어떤 공간에 들어와 있는지, 어떤 세계 속에 와있는지를 눈으로 보면서 연기를 할 수 있어서 당연히 좋고요. 감독 역시 실제로 구현된 세계 속에서 카메라를 설치하니까 일이 수월하죠. 골치 아프게 상상하고 쓸데없는 샷을 찍느라 시간 낭비를 안 해도 되고요.”

박찬욱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VFX(Visual Effects·특수효과) 기반 버추얼 스튜디오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박 감독은 올해 초 공개한 단편 영화 ‘일장춘몽’의 후반부를 촬영하기 위해 경기 하남시에 1만1265㎡ 규모의 버추얼 스튜디오, ‘브이에이 스튜디오 하남’을 구축한 브이에이코퍼레이션과 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감독은 “물론 그린 스크린 앞에서 찍은 다음, 후반 작업에서 (배경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배우들이 황당한 녹색 벽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었고, 또 (버추얼 스튜디오에 적용된) 새로운 기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버추얼 스튜디오는 스튜디오 벽면과 천장을 대형 LED 스크린으로 감싼 공간을 말한다. 촬영에 필요한 다양한 배경을 LED 스크린에 구현해, 설치와 철거를 반복해야 하는 물리적 세트의 단점을 극복했다는 평을 받는다.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원근감을 자동으로 계산해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적용하는 방식이어서 관객이 느끼는 실감도도 높다. 자연히 후반 작업에 드는 시간과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버추얼 스튜디오는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대유행)을 계기로 현지 촬영의 한계가 대두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스타워즈’ ‘쥬라기 공원’으로 유명한 미국 ILM과 ‘아바타’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뉴질랜드 웨타디지털이 먼저 도입했다. 국내에서는 브이에이코퍼레이션을 비롯한 자이언트스텝, 덱스터스튜디오 등 가상 콘텐츠 전문 제작사들이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다.

CJ ENM의 버추얼 스튜디오 '버추얼 프로덕션 스테이지'에서 LED 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 중인 모습. /CJ ENM

올해 들어서는 주요 기업 간 진입 경쟁도 두드러진다. CJ ENM은 지난 5월 24일 경기도 파주 ‘CJ ENM 스튜디오 센터’ 안에 연면적 1650㎡ 규모의 ‘버추얼 프로덕션 스테이지’를 열었다. 지난달 21일에는 SK텔레콤이 경기 성남시 판교 제2테크노밸리에 연면적 3050㎡ 규모의 ‘팀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CJ ENM 측은 “콘텐츠 제작뿐만 아니라, 전 세계 유명 지역의 배경만 다 보유해도 충분한 사업 기회가 마련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SK텔레콤 측은 자체 5G망과 인공지능(AI) 기술 등을 활용해 메타버스 콘텐츠 제작에도 나설 방침이라고 했다.

국내 전자 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버추얼 스튜디오는 고화질의 LED 스크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CJ ENM의 버추얼 프로덕션 스테이지에 LED 사이니지(디스플레이) ‘더 월’을 공급했다. 타원형으로 설치된 더 월의 지름은 20m, 높이는 7.3m다. 가로 32K, 세로 4K의 해상도를 지원한다. 삼성전자는 이 밖에도 360도 촬영을 위한 404㎡ 면적의 LED 디스플레이를 천장과 입구 쪽에 각각 설치했다.

LG전자는 지난 2월 브이에이코퍼레이션과 손잡고 연구개발(R&D) 센터를 열고 버추얼 스튜디오에 최적화된 LED 디스플레이 개발에 나섰다. 양사는 현재 LED 디스플레이에 원격 관리와 색 보정, 조명 프로그램을 적용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이다. LG전자는 앞으로 브이에이코퍼레이션과 쌓은 역량을 발판 삼아 북미·유럽·중동 등 세계 시장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내 실감형 콘텐츠 시장 규모가 2020년 2조8000억원에서 올해 11조7000억원으로 약 5배가량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 국내 업계 관계자는 “버추얼 스튜디오는 굉장히 많은 한계를 뛰어넘는 시설로, 크리에이터가 온전히 창작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며 “콘텐츠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시장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