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계 1위 TSMC의 하반기 실적에 빨간불이 켜졌다. 최대 고객사인 애플과 AMD, 엔비디아 등이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따른 완제품 수요가 둔화되면서 칩 주문량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은 아이폰14(가칭)에 들어가는 칩 주문량을 최대 10% 낮췄다. 반면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기존 물량을 그대로 소화하면서 하반기에도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4일 전자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애플은 오는 9월 출시 예정인 아이폰14에 들어가는 모바일 시스템온칩(SoC) 초기 주문량을 애초 TSMC와 합의한 주문량보다 10% 줄였다. 대만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지타임스는 지난 1일 "TSMC는 주요 고객인 애플이 올해 하반기 칩 주문을 하향 조정하는 것을 확인했다"라며 "올해 주요 업체의 파운드리 주문량은 기존 전망치를 밑돌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초기 주문량은 1억대에서 9000만대 수준으로 낮춘 상황이다.
애플은 연간 2억대 넘는 아이폰을 판매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지난해 아이폰 출하량은 2억2840만대를 기록했다. 업계는 전체 아이폰 출하량의 60~70%가 신제품에 해당하고, 초기 신제품 주문량은 1억대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애플과 함께 글로벌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 AMD도 최근 TSMC에 칩 주문을 줄이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4분기와 내년 1분기에 생산하는 6~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칩 2만개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다만 AMD는 최신 프로세서인 젠4 코어 기반 중앙처리장치(CPU)에 들어가는 5㎚ 칩 주문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다.
엔비디아도 공급망 병목 현상을 제거하고 재고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주문 축소를 검토하고 있다. 가상화폐 가격 하락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가 급감하면서 현재 판매 중인 RTX 3000 시리즈 GPU 재고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하드웨어 전문 매체 아난드테크(Anandtech)는 지난달 29일 "AMD가 PC 수요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칩 주문을 줄였고, 엔비디아도 GPU 수요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주문 축소를 검토 중이다"라며 "정보기술(IT) 기업들의 재고 관리 문제가 공급망 이슈에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라고 했다.
엔비디아는 생산을 앞두고 있는 RTX 4000 시리즈(5㎚ 공정 적용) 초기 주문량도 줄일 계획이지만, TSMC가 주문량 감소에 따른 가격 조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다. 디지타임스는 "주문량을 줄이려는 엔비디아와 가격 양보에 부정적인 TSMC의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라며 "TSMC는 엔비디아의 물량을 대체할 고객사를 찾고 있다"라고 했다.
TSMC는 칩 주문량이 줄어들면서 전년 대비 25%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 올해 매출 전망치를 내부적으로 하향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TSMC의 지난해 연매출은 1조5874억대만달러(약 68조6400억원)로, 연초 TSMC는 올해 매출이 2조대만달러(약 88조5409억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최근 전망치를 5~10% 낮춘 것으로 전해졌다.
파운드리 업계 2위 삼성전자는 매출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TSMC 대비 주문량이 많지 않아 하락 폭이 작고, 고성능 컴퓨팅(HPC) 파운드리 수요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문수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부사장은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올해 하반기에는 성장 둔화 및 세계 정세 불안정 등 불확실성이 있지만 5세대 이동통신(5G) 비중 증가, HPC 수요 강세로 파운드리 공급 부족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