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지난달 30일 방한한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의 만남으로 두 회사 협력이 더 공고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래먹거리 발굴에 있어 두 회사가 경쟁보다는 공존을 택했다는 것이다.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한 삼성전자와 인텔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지난해 인텔이 선언한 종합반도체(IDM) 2.0 전략의 한 축인 파운드리 강화는 삼성전자에 강력한 위협이 되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TSMC와 격차가 큰 2위 삼성전자가 후발주자인 인텔의 도전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인텔은 겔싱어 CEO 주도로 첨단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계약하면서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직접 EUV 생산지인 네덜란드로 날아가 장비 공급을 위한 보폭을 넓힌다.
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네덜란드 ASML의 하이 뉴메리컬어퍼처(High NA) EUV 노광장비인 트윈스캔 EXE:5200 5대를 2024년 독점적으로 공급받는다. EUV 장비 확보에 가장 적극적인 경영자로 알려진 겔싱어 CEO는 "장비 확보가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에 가장 중요한 과제다"라며 피터 베닝크 ASML CEO에 직접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이NA EUV 장비는 인텔이 2024년 양산을 계획하고 있는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에 사용될 예정이다. 기존 EUV 장비 대비 빛이 나오는 렌즈 구경을 확대해 더 세밀한 회로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대당 가격이 5000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첨단 미세공정 분야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는 TSMC와 삼성전자도 이 장비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인텔보다 늦은 시점인 2025년 장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마저도 연간 생산 가능 대수인 5대를 나눠 가져야 한다.
노광 공정은 웨이퍼(반도체 원판) 위에 전기 회로를 새기는 반도체 전(前)공정의 핵심 작업이다. 회로를 어떻게 새기느냐에 따라 반도체 성능과 품질이 달라진다. EUV 노광장비는 회로 폭을 나노 수준(보통 10㎚)으로 미세하게 그릴 수 있는 장비다. 일반적으로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얇으면 얇을수록 저전력·고성능 특성을 보이고, 같은 웨이퍼 면적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EUV 노광장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ASML이 생산하고 있다. 한 해에 40대쯤을 만든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더디니 장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ASML이 반도체 업계의 슈퍼을(乙)로 불리는 이유다. 삼성전자가 선언한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 목표가 이 장비 확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삼성전자가 확보한 EUV 장비는 약 15대로 추정되고 있다. 파운드리 1위 TSMC가 100여대를 갖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7분의 1 수준이다. 여기에 인텔이 EUV 장비 확보전에 뛰어들면서 삼성전자가 가진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EUV 장비 10대를 추가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근 EUV 장비의 사용처가 메모리 반도체로 넓어지면서 계획대로 공급이 될지 미지수다. TSMC나 인텔은 물론,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등과도 장비 확보전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EUV 장비 생산을 위한 렌즈와 반도체 등이 공급난을 겪고 있어 생산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모두 EUV 장비를 쓰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네덜란드로 날아가 ASML 측과 만난다. 장비 공급을 약속받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예정된 두 차례의 재판도 미뤘다. 앞서 지난 2020년 10월에도 이 부회장은 ASML 본사를 방문해 장비 수급과 관련한 협의를 했다.
현재 착공을 앞둔 170억달러(약 21조원) 규모의 미국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은 2024년 양산이 잡혀있다. 5㎚ 미세공정을 도입하는 공장이어서 EUV 장비가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EUV 장비는 생산에 2년여가 걸려 지금 장비 공급을 확정지어야 시간표대로 장비를 받을 수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도 EUV 적용을 시작하고 있어 장비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상황이다"라며 "이 부회장의 출장은 앞으로 5년간 사용할 장비를 확보하고자 하는 차원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