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기업(CP)이 인터넷서비스제공자(ISP)와 망 투자를 분담해야 하는가’를 놓고 전 세계가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망 사용료를 둘러싼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의 법정 싸움이 불씨가 됐다.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티에리 브르통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내부시장 담당 위원은 최근 프랑스 매체 레제코와의 인터뷰에서 “빅테크 기업들이 망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라며 “올해 연말까지 해당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브르통 위원은 “20년 넘게 시행된 오래된 규칙으로 인해 통신사들이 투자에 따른 수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을 위한 보상 방안도 재고해야 한다고 했다.
올해 초부터 이어진 유럽 통신사들의 입법 요구에 EU가 호응하고 나선 것이다. 독일 도이치텔레콤, 프랑스 오랑주, 영국 보다폰, 스페인 텔레포니카 등 유럽 대표 통신사들은 지난 2월 EU 의회에 서한을 보내 빅테크의 망 투자 참여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들은 별도로 낸 성명에서 “통신사들이 연결에 필요한 각종 투자를 하는 동안 빅테크 기업은 적은 비용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며 “심지어 이들은 더욱더 고화질인 영상 스트리밍을 추진하고 있는데 통신사들의 부담은 무한대로 커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통신사들은 “결국 위험에 처하는 건 설비투자다”라며 “지금의 불균형이 해결되지 않으면 유럽의 통신 서비스 품질은 여느 다른 지역보다 뒤처지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220여개국 750개 통신사가 모여 만든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GSMA)는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서 망 투자 분담 요구와 관련한 보고서를 채택했다. GSMA가 지난 16일 공개한 이 보고서에는 “전체 인터넷 생태계 규모가 2015년 3조3000억달러(약 4182조4200억원)에서 2020년 6조7000억달러(약 8491조5800억원)로 성장하는 동안 통신사들의 설비투자 수익률은 6~11%에 불과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오스트리아 통신 3사도 지난 1월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프랑스통신사업자연맹(FFT)은 대선 후보들에게 정책 제안문을 보내 도움을 호소했다. 유럽통신사업자연합(ETNO)은 지난 16일 ‘유럽의 인터넷 생태계: 모두가 공정한 몫으로 기여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들이 망 투자 비용을 분담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을 논의했다.
ENTO가 영국 정보기술(IT) 컨설팅업체 액슨그룹에 조사를 의뢰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구글, 넷플릭스,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6대 빅테크 기업은 지난해 전 세계 트래픽의 55% 이상을 유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통신사들은 이에 따라 매년 280억유로(약 37조5525억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내는 것으로 집계됐다.
논쟁의 시작은 SK브로드밴드가 2019년 11월 방송통신위원회에 망 사용료 협상을 중재해 달라며 낸 재정 신청이었다. 넷플릭스는 이듬해인 2020년 4월, 방통위의 재정 절차를 거부하고 망 사용료를 낼 의무가 없다는 취지의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후 지난해 6월 SK브로드밴드의 손을 들어줬으나,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가 각각 항소와 반소를 제기하면서 2심이 진행 중이다.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가 자사 망을 통해 이윤추구 행위를 하는 만큼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넷플릭스는 자체 개발한 콘텐츠전송네트워크(CDN)를 적용하면 트래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망 사용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양사 갈등이 좀처럼 봉합되지 않는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망 사용료 의무화를 골자로 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쏟아냈다. 그중 한 명인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부가통신사업자가 정당한 대가를 내지 않으면서 인터넷접속역무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는 금지 행위다”라고 명시한 법안을 발의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망 사용료 관련 법안은 총 6개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임혜숙 당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한상혁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ISP 역차별을 이유로 CP의 망 사용료 지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일련의 상황을 두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에서 불거진 망 사용료 논란을 지켜보던 유럽 통신사들이 SK브로드밴드와 같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한국이 앞으로도 주 무대 역할을 할지는 미지수다. 망 사용료 법안 제정 문제가 한미 통상 이슈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서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이달 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망 사용료 법에 대한 우려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USTR은 특히 이 법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조항 제14조와 제15조 등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조항에는 ▲자국의 지배적 사업자가 다른 쪽 당사국의 공중 통신 서비스 공급자에게 자신·자회사·계열사 등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부여하도록 보장(14.4조) ▲자국 영역의 지배적 사업자가 다른 쪽 당사국의 서비스 공급자에게 합리적·비차별적 조건과 요율로 공중 통신 서비스인 전용회선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보장(14.9조) ▲양 당사국은 국경 간 전자 정보 흐름에 불필요한 장벽을 부과하거나 유지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노력(15.8조) 등이 명시돼 있다.
USTR은 이 밖에도 해외 업체가 구축한 망으로 혜택을 누리는 국내 통신사들이 미국 기업의 ‘무임승차’를 지적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이에 법안 의결에 앞서 공청회를 열겠다고 밝힌 상태다. 하지만 다음 달 1일 지방선거와 21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이 눈앞으로 다가온 만큼 개최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 정부 관계자는 “망 사용료 의무화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하는 사안이다”라며 “최종이용자인 소비자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 ISP가 CP에게 망 사용료를 물리면 CP는 그만큼 콘텐츠 이용료를 높일 수밖에 없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