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경기 평택캠퍼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가 반도체 업계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시스템반도체 역량 강화가 꼭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경쟁자와 격차를 유지하고 있지만, 반도체 설계나 위탁생산(파운드리) 등 시스템 분야에서는 오히려 경쟁자를 뒤쫓는 처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스템반도체 업체들이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어 삼성전자도 분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업계 리더십을 공고히 하려면 지금과 같은 속도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4일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인텔, SK하이닉스, 마이크론, 퀄컴 등 파운드리를 제외한 상위 10개 업체의 지난해 점유율은 57.1%로 나타났다. 이는 2008년 44.9% 수준이었던 것에서 12.2%포인트 확대된 것으로, 이들의 매출 규모 또한 같은 기간 1191억달러(약 151조원)에서 3512억달러(약 445조원)로 크게 늘었다. 상위 50대 기업이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81%에서 지난해 89%로 확장됐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시장이 고도화할수록 상위 업체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라며 “거둔 이익으로 투자가 이뤄지고, 또다시 이익을 얻는 선순환 구조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코나(하와이)=공동취재단

지난해 매출 상위 10개 회사의 또 다른 특징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2008년은 상위 10개 회사 중 팹리스는 퀄컴 하나뿐이었지만, 지난해는 퀄컴, 엔비디아, 브로드컴, 미디어텍, AMD 등 다섯 개 회사로 늘었다. 상위 10개 회사 중 팹리스 매출 비중은 2008년 5.46%에 불과했으나, 지난해는 30.64%로 6배쯤 증가했다.

팹리스는 전 세계적인 반도체 수요 증가로 매출 규모를 늘릴 수 있었다. 특히 5세대 이동통신(5G),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초고성능컴퓨팅(HPC) 등의 등장으로 반도체 중요성이 커졌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는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반도체 수요를 더욱 밀어 올렸다.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반도체 공급난이 발생했고 팹리스 등의 약진이 시작됐다.

또한 이들 팹리스는 대규모 M&A를 추진하거나 성사시키면서 몸집을 더욱 키우고 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의 인수 시도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엔비디아는 약 44조원에 ARM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각국 경쟁당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ARM은 스마트폰 두뇌인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설계 자산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회사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 /AMD 유튜브

AMD 역시 약 58조원에 자일링스를 인수했다. 자일링스는 모든 신호를 하드웨어에서 실시간 처리하는 FPGA 설계 기업 선두 회사다. 임베디드 산업, 자동차, 데이터센터 AI, 무선 및 유선 네트워킹, 항공우주 등 광범위한 산업에 활용되는 칩을 만든다.

시스템반도체 분야는 아니지만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부문 인수(약 11조원 규모) 역시 세기의 빅딜로 여겨진다.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업계 톱3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인텔 낸드 부문 인수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인텔과 퀄컴 등도 최근 잇따라 M&A에 나서면서 사업 재편을 시도하는 중이다.

IC인사이츠는 대형 M&A로 반도체 업계의 순위가 바뀔 수 있다고 본다. IC인사이츠 측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M&A 가능성을 고려할 때, 반도체 업계가 성숙기를 향해 나아가면서 반도체 순위는 몇 년간 상당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라고 했다.

파운드리 업계 1위 TSMC의 고공행진도 눈에 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인텔은 각각 반도체 시장 점유율(매출 기준) 12.3%(약 731억달러), 12.2%(약 725억달러)로 나란히 1, 2위를 달리고 있고, SK하이닉스의 경우 6.1%(363억달러)로 3위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는 TSMC와 같은 파운드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TSMC는 지난해 연간 약 568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 조사대로라면 TSMC는 SK하이닉스보다 매출이 높은 사실상 업계 3위다.

TSMC 팹16. /TSMC 제공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인 삼성전자는 인텔을 밀어내고 현재 시장 1위의 지위를 갖고 있지만, 이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전체 매출에서 메모리 쏠림이 커 메모리 시장 상황에 따라 매출 변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경쟁력은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M&A 등으로 역량을 높여야 한다는 시장 주문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인텔의 경우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 매출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170조원의 대규모 투자, 대형 M&A 등을 통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다만 이 계획은 오너의 사법리스크 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2016년 자동차 전장 사업 강화를 위해 약 9조원을 들여 인수한 하만이 현재까지 삼성전자의 마지막 대형 M&A다. 삼성전자가 투자를 망설이는 동안 매물로 나온 반도체 기업들은 기업가치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M&A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SK하이닉스가 크고 작은 M&A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에 비해 삼성전자의 움직임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것처럼 비친다. 박정호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는 최근 있었던 주주총회에서 엔비디아가 실패한 ARM 인수를 컨소시엄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이 현 정부에서 막힌 점은 삼성전자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라며 “대규모 M&A와 투자를 통한 몸집 불리기는 당분간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