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인텔은 반도체 제조 공정 분야에서 경쟁사에 비해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전자에 반도체 1위 자리를 내어준 것도 이런 한계 역량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뤘다. 미국 월가는 인텔에 제조 공정을 버릴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AMD와 같은 반도체 설계기업(팹리스)으로 남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텔은 회사의 전설적인 엔지니어로 불렸던 펫 겔싱어를 새 최고경영자(CEO) 영입하고, 종합반도체기업(IDM) 2.0을 선언했다. 미진한 제조 공정을 버리지 않고, 다시 이 분야 역량을 갖추겠다는 게 펫 겔싱어 체제의 인텔 신(新)전략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이 있다.
인텔의 전략 달성을 위해 지역별 조직은 최적화가 이뤄졌다. 공급망은 물론 각 지역 파트너와의 유기적인 협력을 하고자 미국과 중국, 유럽, 아시아·태평양·일본 등 4개의 지역(리전)은 이전보다 더 지역별 특화된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각 리전에는 총괄 책임자를 앉혔다.
인텔의 주요 전략지로 꼽히는 아시아·태평양·일본(APJ)은 싱가포르에 위치하며 약 3만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리전을 이끄는 건 스티브 롱 부사장(CVP)이다. 앞서 그는 인텔의 영업과 마케팅, 홍보부서를 이끌었다. 롱 부사장이 지난해 11월 APJ 수장에 오른 뒤 지난 2일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기자들과 만났다.
롱 부사장은 "인텔은 지난 50년 이상 아태 지역에 관심을 두고 활동해 왔다"라며 "이 지역은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는 "반도체 업계와 기술 변화를 볼 때, 현재가 최고의 시기다"라며 "사물의 인터넷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반도체가 현대판 원유가 돼 가고 있다"라며 "(반도체 시장 규모는) 1조달러(약 1263조원)로 성장할 전망이어서 인텔에도 최고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했다.
인텔은 정보기술(IT) 분야의 4가지 '슈퍼파워'를 꼽고, IDM 2.0을 통해 이 분야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4가지 슈퍼파워는 인공지능(AI)과 연결성(5세대 이동통신), 클라우드, 말단(엣지) 컴퓨팅 인프라 등으로 롱 부사장은 "4가지 슈퍼파워에 있어 기술 선도적인 제품의 공급, 개방형의 안전한 솔루션 제공, 제조 규모 확장, 사람에 대한 투자를 하려고 한다"라고 했다.
이어 롱 부사장은 "슈퍼파워라고 하는 것은 인텔의 사업분야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것을 논의하는 하나의 방법이다"라며 "APJ의 역할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인텔은 그래픽카드, 파운드리 서비스, 모빌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자율주행을 새 성장 분야로 여긴다. 롱 부사장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중심에 제조 역량이 있다"라며 "대규모 글로벌 제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글로벌화된, 차별화된 역량을 제공하는 것이 인텔의 목표다"라고 했다.
롱 부사장이 한국을 찾은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한국의 뛰어난 역량과 선진 기술에 대한 이해가 인텔의 신전략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롱 부사장은 "이번 방한의 목표는 현장에서 고객과 파트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라며 "파트너사들의 비즈니스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리고 인텔이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클라이언트 컴퓨팅 고객사, 엣지·네트워크 전환 관련 고객, 통신 서비스 제공 파트너를 만났다"며 "(통신 회사들은) 특히 5G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롱 부사장은 "한국 혹은 일본과 같은 선진시장은 기술 역량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라며 "대만은 전 세계의 엔진룸이라고 할 수 있고 많은 것들이 대만에서 만들어져 수출된다"고 했다.
롱 부사장은 특히 한국 시장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그는 "한국은 매우 고도화된 시장으로, 전 세계 소우주 같은 곳이다"라며 "항상 최신 기술을 활용하고 있어 한국이 신기술을 하면 다른 국가도 따라오게 된다"라고 했다. 이어 롱 부사장은 "한국은 전 세계에서 AI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곳이기도 하다"라며 "정부와 민간업체 모두 관심이 높아 최신 기술에 대한 시험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인텔의 IDM 2.0와 관련한 제조 시설 투자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빠졌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텔은 미국에는 초기 24조원을, 유럽에는 110조원을 들여 파운드리 역량을 강화하기로 했다. 롱 부사장은 "다변화하고, 복원성을 지닌 글로벌 공급망은 매우 중요하고, 소비자에게는 (공급망 다변화가)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라며 "하나의 회사가 (팬데믹 등으로) 셧다운하면 출하에 차질이 생겨 소비자는 불편을 겪게 된다"라고 했다.
롱 부사장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파트너와 많은 논의를 한 결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망 변화는 오히려 기회라는 것이 확실해졌다"라며 "유럽과 미국에 투자해 시설을 늘려도 이를 뒷받침하는 건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다"라고 했다.
롱 부사장은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다시 뛰어드는 것에 대해 "인텔이 파운드리를 열고 경쟁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급망 전체 차원에서 봤을 때,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파트너다"라며 "더 큰 차원의 협업이 가능하다는 건데, 이 상황을 어떻게 접근하는지가 관건이고 인텔은 진정성을 가지고 투명하게 논의하고자 한다"고 했다.
펫 겔싱어 인텔 CEO는 글로벌에서 800억달러(약 101조원) 이상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 투자에는 아시아도 포함돼 있다는 게 롱 부사장의 설명이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투자는 그 일환이다. 신규 인수합병(M&A)에도 적극적이다. 롱 부사장은 "(이스라엘) 타워세미컨덕터 인수가 완료되면 아시아지역에서 인텔 위상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타워세미컨덕터는 무선주파수(RF) 등 자동차 반도체를 주로 만드는 파운드리로, 지난 2월 인텔이 6조5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롱 부사장은 한국 투자에 관해서도 밝혔다. 우선 인텔은 동남아와 인도를 먼저 투자하겠다는 방침이나, 한국의 최첨단 기술 역량 강화에 관심이 높다. 다만 생산시설 투자 계획은 없다. 롱 부사장은 "인텔코리아의 요구는 투자 속도를 높여달라는 것이었다"라며 "더 빠르게 투자 규모를 확대하는 것을 논의 중이다"라고 했다. 업계는 인텔이 공장 증설을 위해 국산 반도체 장비 다수를 도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해 소재 업체와의 협력도 기대된다. 롱 부사장은 조만간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