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줍다가 얼떨결에 도시로 와버린 ‘도구리(도둑 너구리)’. 정신을 차려보니 K-직장인이 돼 있다. 엉망진창 막내여도 괜찮아, 귀여우면 됐지. 사회초년생 도구리의 우당탕탕 회사 생존기.
사회초년생 MZ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 '도구리'를 만든 엔씨소프트 캐릭터사업부의 윤조희(왼쪽부터), 류영인, 조소윤 매니저가 지난 21일 경기 성남시 삼평동의 엔씨소프트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는 모습. /엔씨소프트 제공

지난해 1월 엔씨소프트가 선보인 캐릭터 도구리에 대한 설명이다. 도구리는 엔씨소프트의 대표 게임인 ‘리니지2M’에 등장하는 몬스터 도둑 너구리를 활용해 만든 캐릭터다. 엔씨소프트는 도구리를 활용해 다양한 상품을 기획·판매하고 있다. 웹툰 등 콘텐츠도 만들고, 지난해에는 수제 맥주 브랜드와 ‘도구리 병맥주’도 선보였다.

도구리 티셔츠는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다. 티셔츠 앞면에는 눈을 반짝이는 도구리의 얼굴과 함께 ‘넵! 알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지만, 뒷면에는 직장 상사를 겨냥한 듯 ‘모르겄는디’라는 귀여운 표정의 도구리가 있다. 이 티셔츠에 대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태어난 세대)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MZ세대가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직장에 입고 가면 인싸되는 티셔츠’로 유명하다. 현재 이 티셔츠는 사고 싶어도 못 사는 물건이 됐다. 출시 이틀 만에 물량이 모두 팔렸고, 이후 6차례 재발매된 물량도 품귀현상을 겪고 있다. ‘각박한 회사에서 홀로 버텨온’ 직장 막내끼리 실수담을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막내클럽’과 온라인 직장인 생존유형 테스트에는 각각 30만명, 400만명이 참여했다.

MZ세대가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직장에 입고가면 인싸되는 티셔츠’로 회자되며 큰 인기를 얻은 도구리 티셔츠. /엔씨소프트 제공

게임사에 성공적인 캐릭터 지식재산권(IP) 확보는 폭넓은 소비자를 게임으로 유입시키는 통로로 자리 잡았다. 국민 캐릭터 ‘카카오 프렌즈’를 활용해 게임 플레이 경험이 없는 중년 여성까지 모바일 게임 프렌즈팝으로 끌어온 카카오게임즈가 대표적이다. 어린이 만화책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메이플스토리 캐릭터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IP를 확보한 넥슨도 있다.

도구리는 엔씨소프트가 그동안 회사를 지탱해준 ‘린저씨(리니지의 충성 고객인 중년 남성)’ 중심의 사업에서 탈피하기 위한 출발점이 됐다. 게임사가 만든 캐릭터지만 관련 사업 어디에도 게임이나 리니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구리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 중 상당수는 이 캐릭터가 엔씨소프트가 만든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도구리 캐릭터는 게임보다 커피로 업무에 지친 몸에 ‘수혈’하고 재테크에 더 관심이 많다. 도구리가 활동하는 배경 역시 10세기 전후 유럽의 가상 세계가 아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다. 도구리가 대변하는 세대 역시 구매력 있는 린저씨가 아닌 사회생활에 열심히 적응하고 있는 젊은 층이다.

사회초년생의 마음을 담아 '월요일이 싫어요'라는 문구가 들어간 도구리 캐릭터 수건. /엔씨소프트 제공

젊은 세대의 생생한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도구리 사업을 맡은 캐릭터사업부는 MZ세대 직원에게 많은 자율권을 부여했다. 마케팅 아이디어 회의는 20대 직원들이 도맡았고, 40대 총괄 프로듀서(CP)와 50대 실장 등 의사결정권자는 승인과 실행만 도왔다. 이 부서에서만큼은 막내들이 ‘보스’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지난 21일 경기 성남시 삼평동 사무실에서 도구리의 모습을 쏙 빼닮은 28~30세, 만 1~3년 차 사회초년생 3명을 조선비즈가 만났다. 캐릭터사업부 브랜드마케팅팀에서 마케팅 캠페인 기획 및 운영을 맡은 조소윤 매니저와 윤조희 매니저, 운영팀에서 데이터 분석 및 사업 운영 관리를 맡은 류영인 매니저가 주인공이다. 전국의 막내들이 열광하는 캐릭터를 만든 실제 판교 막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함께 도구리 관련 사업 아이디어를 고민중인 엔씨소프트 캐릭터사업부의 막내 직원들. /엔씨소프트 제공

ㅡ 도구리는 원래 게임에서 어떤 캐릭터였나.

윤조희 “다른 존재들 사이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고, 언뜻 보면 하찮은 존재, 아직 어리숙하지만 귀여운 존재다. 리니지2M은 이용자가 가상현실을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를 잡고 경험치와 아이템을 보상으로 얻는 게임이다. 반면 도둑 너구리는 레벨 30 정도의 초보 이용자에게 나타난다. 레벨 30은 게임 시작 이틀 내에 달성할 수 있는 ‘신입’ 레벨이다. 이용자가 도둑 너구리를 잡아봤자 보석 1개밖에 못 얻을 때가 많은데, 가장 기본적인 장신구인 ‘현자의 목걸이’를 제작하려고 해도 보석이 40개는 필요하다. 이 때문에 게임 내에서 도구리는 크게 필요 없는 김빠지는 존재처럼 치부되기도 한다. 그래도 초기 사용자에겐 없어선 안 되는 중요한 존재다.”

ㅡ 도구리를 어떻게 사회초년생 직장인 캐릭터로 재탄생시켰나.

조소윤 “회사에서 우리 막내들의 존재가 게임 속 도구리와 같지 않나. 분명 존재하지만 큰 성과를 내고 일을 척척 해내는 선배보단 눈에 덜 띄고, 키우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렇지만 회사에는 분명 꼭 필요한 존재다. 이런 배경에서 도구리를 고군분투하는 ‘K-직장인 MZ세대’로 만들었다. 컴퓨터 그래픽 속 실사에 가깝게 구현됐던 캐릭터가 친근하고 귀여운 캐릭터로 재탄생한 것이다.”

세 사람은 도구리가 “시켜만 주십쇼”라며 웃지만 뒤로는 “야근은 말고”라며 벌벌 떨고 있는 모습, ‘넹’이라고 하면 ‘귀여운척하는 느낌’은 아닐지 ‘넵!’만 반복하면 로봇처럼 보이는 건 아닐지 고민하는 모습이 사회초년생 소비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강조했다. 이런 생생한 묘사는 모두 회사 내 말단 직원인 MZ세대의 솔직한 심정이 가감 없이 캐릭터에 담겨 말단 위까지 올라갔고 무리 없이 승인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ㅡ 젊은 세대 직원의 의견이 도구리에 바로 반영될 수 있는 이유는.

조소윤 “부서 구조상 도구리 관련 아이디어는 모두 ‘상향식(바텀업)’ 구조로 결정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4050 의사결정권자들도 적어도 이 사업은 막내들이 더 잘 알 것이라며 존중했다. 예컨대 막내클럽의 경우 처음 팀장님이 골랐던 아이디어는 직장생활에 지친 MZ세대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우리가 위로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걸 보고 막내들이 ‘요새 젊은 세대는 위로를 원하지 않으며 마음 터놓고, 고삐 풀고 말할 공간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팀장님이 이를 수용해 새로운 콘셉트로 막내클럽을 출시했고 큰 인기를 얻었다. 요즘 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면 환자다’라고 하지 않나. 윗세대만 있었다면 얻을 수 없었던 ‘젊은 감성’을 막내들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다.”

'상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문구가 새겨진 도구리 '호시탐탐 눈치 거울'. /엔씨소프트 제공

ㅡ 도구리에 누가 열광하나.

류영인 “소비자 구매 데이터나 소셜미디어(SNS) 유입 분포 등을 분석해보면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젊은 소비자들이 도구리에 열광한다. 처음엔 여성 소비자가 70% 정도라고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성비가 비슷한 것으로 안다. 고객 데이터를 살펴봐도 리니지 게임과 도구리의 연관성이 없다. 소비자들이 신입사원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반응하는 것 같다.”

ㅡ 다른 게임사에도 인기 있는 캐릭터 IP가 많다. 도구리의 차별점은.

윤조희 “다른 게임사 캐릭터는 특정 게임의 세계관이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그 게임을 잘 모르는 소비자가 그 캐릭터에 게임 이용자만큼 애착을 갖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엔씨소프트는 리니지 게임과 별개로 신입사원과 오피스(사무실)라는 독립된 정체성과 세계관을 만들었다. 엔씨소프트나 게임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도구리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

류영인 “우리는 게임의 인기에 따라 캐릭터 인기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회사나 게임에 대한 인식과 별개로 소비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도구리는 리니지를 좋아하든 아니든 신입사원이라면 ‘좋아요’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ㅡ 판교 IT 회사 막내 ‘도구리’로서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

조소윤 “야근이 무섭고, 실수할까 두려운 사회초년생의 생활은 어디든 똑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판교 IT 업계의 장점은 막내임에도 의견을 비교적 평등하게 많이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엔씨소프트에 입사하기 전 패션 회사에서 근무했는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느낌이 강했고, 신입사원은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제시하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곳에선 수평적으로 막내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도구리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 생각한다.”

류영인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곳인 만큼 도전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덕분에 막내로서 책임감도 커서 실수할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현재 도구리 사업의 경우 수익성을 떠나 회사에서 ‘돈 생각하지 말고 일단 도구리를 알리는 데 신경 쓰자’라며 막내들을 격려하고 있다. 어차피 힘든 막내 생활, 어디서든 해야 한다면 판교에서 도구리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