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전 세계 반도체 공급난이 장기화 양상을 띄고 있다. 반도체 업계는 적어도 2년은 이런 공급 부족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장비 수급도 어렵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슈퍼을(乙)’로 꼽히는 네덜란드 장비 제조사 ASML 역시 장비 공급이 수요에 턱없이 모자란다고 밝혔다.
23일 외신 등에 따르면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반도체 제조 장비를 지난해에 비해 올해 더 많이 생산할 계획이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출하량을 늘릴 예정이지만 적어도 2년간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의 공급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베닝크 CEO는 “(반도체 장비) 수요 곡선을 보면 (장비 공급 물량이) 충분치 않고, (ASML이) 생산능력을 50% 이상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다”라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생산능력 확대에 대한 방안도 검토했지만, 투자 규모에 대해서는 확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ASML은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에 이은 업계 2위지만, ‘슈퍼을’로 불린다.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 장비로 꼽히는 EUV 노광장비의 전 세계 유일 생산 업체이기 때문이다.
노광공정(Photolithography)은 반도체 원판(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공정으로, 반도체 집적재료를 원하는 패턴으로 깍아내는 작업이다. 일종의 ‘틀’인 마스크를 따라 웨이퍼 위에 빛으로 패턴을 그려넣는데, 공정이 미세할수록 설계 정밀도와 집적도에 영향을 미친다. 반도체 제품의 성능과 용량 등에 직결되는 공정이 바로 노광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ASML의 EUV 노광장비는 한 대에 2000억원을 호가하는 초고가임에도 반도체 제조사가 장비 확보를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지난해 42대를 만들어 63억유로(약 8조4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대만이 44%, 한국이 35%를 차지했다. 중국은 미국 제재로 16%에 그쳤다. ASML은 노광장비 분야에 있어 전체 시장의 85%를 점유하고 있으며, 경쟁사로는 일본 니콘과 캐논이 꼽히지만 격차는 매우 크다.
EUV 노광장비는 주로 대만 TSMC,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로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여기에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재진출하면서 장비 쟁탈전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ASML은 올해 55대, 내년 60대의 EUV를 생산하기로 했다. 베닝크 CEO는 “올해와 내년에는 D램 생산을 위한 EUV 장비 출하량이 더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특히 빅데이터, 인공지능(AI), 5세대 이동통신(5G), 자율주행차 등의 등장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자 반도체 제조사들은 천문학적인 시설 투자를 예고하고 있다. 이에 따른 장비 확보는 당면 과제다. 펫 겔싱어 인텔 CEO는 “장비 확보가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에 가장 중요한 과제다”라고 했다. 인텔은 미국과 유럽 등에 대대적인 시설투자를 발표한 상태로, 겔싱어 CEO가 베닝크 ASML CEO에 직접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베닝크 CEO는 “현 시점에서는 공급이 제한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공급난이) 결국 해결될 것이다”라고 했다. 보통 반도체 장비는 착공 뒤 2년여가 지나야 들여올 수 있기 때문에 현재 공급난은 지금 당장 공장을 지어도 최소 2~3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수요는 여전히 높지만, ASML의 EUV 장비 증가폭은 올해도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라며 “전체 반도체 생산에서 미세공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만큼 반도체 공급난은 앞으로 2년 이상 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