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세밀한 회로로 성능을 높이는 반도체 미세공정이 한계에 다다르자, 세계 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여러 개를 묶는 '패키징' 공정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 수조원대의 투자도 진행하는 중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TSMC가 가장 앞섰고, 삼성전자는 상대적으로 행보가 더디다는 평가가 나온다.
8일 반도체 업계 및 대만 언론 등에 따르면 TSMC는 대만 남부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새로 짓는다. 이 공장은 현재 TSMC의 주력 반도체인 5㎚(나노미터·10억분의 1m)를 주로 맡을 것으로 보인다. 새 공장은 TSMC의 대만 내 여섯 번째 패키징 공장이다. 이미 4개의 공장을 운영 중에 있고, 한 곳의 공장을 북부 과학단지에 짓고 있다.
반도체 패키징 작업은 쉽게 말해 반도체 여러 개를 쌓거나, 묶는 것이다. 과거에는 단순히 회로 보호를 위해 포장하는 일을 의미했다. 그런데 반도체 미세공정의 한계로 반도체 성능 향상 폭이 제한되다 보니, 여러 개를 함께 사용해 성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보통은 하나의 칩에 두뇌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CPU), 데이터의 통로가 되는 D램, 데이터를 저장하는 낸드플래시를 통합하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 필요에 따라 그래픽처리장치(GPU)나 신경망처리장치(NPU) 등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로 묶인 반도체는 단일 반도체 여러 개보다 부피가 작고, 소비전력이 적다. 또 성능도 높아진다.
TSMC가 반도체 패키징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서다.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서버 등에서 패키징 공정으로 만들어진 통합칩(SoC)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여기에 대량의 데이터·영상 처리가 필수인 자율주행 분야에서도 수요가 많다. 애플과 엔비디아, 미디어텍, 퀄컴 등이 TSMC를 통해 통합칩을 만들고 있다.
TSMC는 높은 패키징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일본과의 접점을 늘리고 있기도 하다. 일본 이바라키현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 내에 370억엔(약 4000억원)을 들여 패키징 연구개발(R&D)센터를 짓는다. 이곳에서 TSMC는 반도체 3개를 쌓아 올리는 3차원(3D) 집적회로(IC)의 재료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 TSMC R&D 센터에 190억엔(약 2000억원)을 지원한다. 또 관련 독자 기술을 갖고 있는 재료 분야의 쇼와덴코머티리얼, JSR, 이비덴, 신코전기고업과 장비 분야의 우시오전기, 캐논, 디스코, 도쿄정밀 등이 함께하는 개발 프로젝트도 출범했다. 이들과 TSMC가 함께 기술 연구를 수행한다.
인텔 역시 패키징 분야 투자를 늘리고 있다. 패키징 기술 확보를 위해 미국 뉴멕시코 후공정 공장에 35억달러(약 4조3000억원)를 투자해 증설에 들어갔다. 이 시설을 통해 만들어지는 칩은 인공지능(AI) 등의 분야에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말레이시아에도 70억달러(약 8조6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짓는다. 이탈리아에는 80억유로(약 10조7000억원) 규모의 패키징 공장을 세운다. 이는 인텔이 지난해 발표한 유럽 투자금 800억유로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삼성전자 역시 새로운 반도체 패키징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로직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평평한 판 위에 얹는 2.5차원(2.5D) 패키지, 최신 극자외선(EUV) 공정으로 만든 로직 집적회로(다이) 위에 메모리(SRAM)를 올리는 3D(엑스큐브) 패키징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또 삼성전자는 3.5D 패키징 공정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 공정은 고객사 맞춤형 초고성능 메모리를 엑스큐브 패키징에 결합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런 반도체 패키징 기술들을 총망라해 'SAFE(삼성첨단파운드리생태계)'라고 부르고, 매년 관련 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다만 업계는 삼성전자의 미진한 투자에 대해 우려를 보내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패키징 분야에 몇 년간 얼마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일도 없다. 반도체 패키징 분야는 2015년부터 연평균 4.84%씩 성장해 오는 2024년 89조원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속에서 기회를 잡으려면 삼성전자도 빨리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라고 했다.
한편, TSMC와 인텔, 삼성전자 등은 최근 반도체 패키징 기술 산업 표준을 논의하는 '유니버설 칩셋 인터커넥트 익스프레스(UCLe) 협력체'를 만들었다. 이 협력체에는 퀄컴, AMD,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참여하고 있다. 패키징 기술 경쟁도 중요하지만, 다른 회사의 기술과 호환, 협력을 추구해 비용과 개발시간 등을 절약하자는 취지다. 협력체는 이른 시일 내에 UCLe 1.0 표준을 마련하고, 곧 차세대 기술 표준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