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삼성사옥을 임직원이 들어가는 모습. /연합뉴스

반도체 자국 우선주의가 확산하면서 반도체 업계의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대한 각국 정부의 견제가 심화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빅딜(대형 M&A)'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3년 내 의미 있는 M&A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삼성전자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14일 반도체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는 최근 영국 ARM 인수를 포기하기로 했다. ARM은 영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로, 엔비디아는 지난 2020년 9월 400억달러(약 47조원)에 ARM을 인수할 계획을 밝혔다. 엔비디아는 각국의 기업결합 심사를 거쳐 지난해 초 인수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의 반대로 M&A가 결국 무산됐다.

주요국들은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자국 반도체 공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업체 간 합병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판단해 반도체 업체 간 빅딜을 통한 반도체 쏠림 현상에 대한 견제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업체 간 협상보다 주요국의 기업결합 승인 심사가 더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픽=이은현

반도체 빅딜을 위해서는 한국, 미국, 유럽, 중국, 영국, 싱가포르, 대만, 브라질 등의 독과점 심사를 받아야 한다. 시장 지배력이 큰 업체가 빅딜에 나설 경우 영향을 받는 주요국의 규제당국이 기업결합 심사와 승인을 내려야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런 규칙은 특정 업체가 독점 사업자가 될 경우 점유율과 가격 결정력을 악용해 다양한 국가에 피해를 입힐 수 있어 만들어졌다.

각국 정부의 반대로 반도체 빅딜이 무산된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정부의 반대로 매그나칩반도체의 중국계 사모펀드 매각이 무산됐고, 독일 정부도 이달 초 대만 글로벌웨이퍼스의 실트로닉스 인수를 제지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3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의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 M&A 승인을 거부한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는 당분간 반도체업계에 빅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작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IC인사이츠는 보고서에서 "반도체 빅딜 흐름이 지난 2020년 정점을 찍고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라며 "반도체 자국 우선주의가 이어지면서 당분간 빅딜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라고 분석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작업자가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이에 따라 지난해 초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3년 안에 의미 있는 M&A 성과를 내겠다"라고 공언한 삼성전자의 M&A 전략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기준 105조원이 넘는 순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1년 내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을 포함하면 삼성전자가 M&A에 투입할 수 있는 자산은 200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자동차용 반도체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 반도체 업체 NXP 인수를 추진한 경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인수 금액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M&A는 무산됐지만, 주요국의 반독점 심사 리스크도 인수 포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스위스 마이크로칩 일렉트로닉스 등을 인수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반독점 심사 리스크가 여전한 만큼 전망이 밝지 않다.

삼성전자가 빅딜에 나설 시기를 놓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지난 몇 년간 사법 리스크에 흔들리면서 반도체 빅딜 기회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하만을 2017년 80억달러(약 9조4000억원)에 인수한 후 M&A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라며 "총수 부재로 빅딜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우려스럽다"라고 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지난 11일 자동차 부품 사업을 담당하는 자회사 하만이 독일 증강현실(AR)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 아포스테라(Apostera)를 인수했다고 밝혔다. 이번 인수는 자회사인 하만과 관련된 내용으로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삼성전자 측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