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 1위 대만 TSMC가 이미 쓰기로 한 수십조원 외에도 대규모 추가 투자 계획을 최근 내놨고, 삼성전자 역시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 건립을 위한 행정 절차에 들어갔다.

여기에 인텔이 가세하면서 파운드리 업계에도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한때 '반도체 제왕'이라고 불렸던 인텔은 파운드리 시장 참전을 위해 수년 간 100조원 이상을 쓰겠다고 밝혔다.

30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200억달러(약 24조원)를 투자해 2개의 첨단 반도체 공장(팹)을 건설한다. 이 공장은 2025년부터 인텔 신제품과 파운드리 제품이 생산될 예정이다. 이에 더해 인텔은 앞으로 10년간 1000억달러(약 120조원)를 들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제조 단지도 육성하기로 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 /인텔 제공

지난해 3월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알렸다. 첨단 반도체 공정 기술력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서 위상이 흔들린 가운데, 돌파구로서 파운드리를 택한 것이다.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2025년까지 1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인텔은 고객들이 신뢰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반도체와 플랫폼, 패키징과 제조 과정을 모두 갖춘 유일한 기업이다"라고 했다.

인텔은 반도체 공급망에 위기를 느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대상으로 거론된다. 인텔은 새 공장에서 1.8㎚(나노미터·10억분의 1m) 미세공정을 적용한 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다.

TSMC는 최근 진행한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에서 올해 400억~440억달러(약 48조~52조원)의 설비투자를 예고했다. TSMC의 올해 투자 규모는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선 인텔의 2배 이상인 수치다. TSMC는 앞으로 수년간 연매출 증가 예상치를 기존 10~15%에서 15~20%로 올리고, 매출총이익 장기 목표치도 50% 이상에서 53% 이상으로 상향했다.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 /TSMC 제공

웨이저자 TSMC CEO는 "회사가 구조적 고성장 시기에 들어서고 있고, 올해 공급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겠지만 수요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것이다"라며 "반도체 가격이 조정을 받더라도 파운드리 선도 기업으로서의 위상과 다년간 이어질 구조적 수요 증가 예상을 고려하면 TSMC가 받을 영향은 크지 않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미국 제2공장이 들어설 테일러시에 공장 부지 병합을 요청했고, 시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내용의 조례를 승인했다. 톰 얀티스 테일러시 도시개발서비스 이사는 "이번 조례 통과는 테일러시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새로 건설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라고 했다. 미 행정 당국이 외국 기업 편의를 위해 토지 구역 변경 등 행정 절차를 마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은 올해 상반기 착공해 2024년 하반기 가동을 계획하고 있다. 설비 투자 금액은 총 170억달러(약 20조5000억원)다.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액 중 최대 규모로, 785개의 간접일자리와 1800개의 직접고용 등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테일러 공장에서는 5세대 이동통신(5G), 고성능 컴퓨팅(HPC), 인공지능(AI) 등 5㎚ 이하 첨단 반도체가 만들어진다. 삼성전자는 퀄컴, 엔비디아, 테슬라, 구글 등에 이곳에서 생산된 반도체를 공급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미국 텍사스 오스틴 공장. /삼성전자 제공

업계는 삼성전자가 올해 70조원 이상을 반도체에 투자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투자액이 포함된 규모다. 지난해에도 43조6000억원을 극자외선(EUV) 기반 15㎚ D램, V6 낸드 등을 위한 평택과 중국 시안 증설 및 공정 전환, 평택 P3 라인 인프라 등에 투자했다. 파운드리의 경우 평택 EUV 5㎚ 첨단공정 증설에 투자가 진행됐다.

업계는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투자에 인텔 가세로 전체 시장 판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파운드리 점유율은 TSMC가 53.1%로 1위, 삼성이 17.1%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0㎚ 이하 미세공정은 TSMC와 삼성전자만이 관련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인텔은 100조원 이상 투자로 10㎚ 시장에 단숨에 뛰어든다는 전략을 세웠다. 최근 세계 유일 EUV 장비 제조사인 ASML과의 장비 공급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인텔은 이미 퀄컴과 아마존 등을 고객사로 영입했다고 지난해 7월 밝혔다. 퀄컴은 인텔 파운드리를 통해 2㎚급(인텔20A)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했다. 아마존은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의 패키징 솔루션을 활용한다.

12인치 웨이퍼. /TSMC 제공

퀄컴은 TSMC와 삼성전자 양측에 파운드리를 맡기고 있어 두 회사로서는 인텔의 움직임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특히 퀄컴의 최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8 1세대는 전량 삼성전자 4㎚ 파운드리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또 인텔은 TSMC에 주고 있는 자사 중앙처리장치(CPU) 등 반도체를 2024년 이후 회수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새로운 고객사를 확보하기 위해 TSMC가 테슬라나 AMD 등 삼성 고객사를 공략할 여지가 있다. 결국 인텔이 10㎚ 이하 미세공정 시장의 '메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관건은 인텔의 미세공정 역량이겠지만, 지금 계획으로는 TSMC와 삼성전자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라며 "10㎚ 이하 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와 삼성전자, 인텔이 뺏고 빼앗기는 피 터지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