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매년 600만건 안팎의 통신자료가 수사기관에 제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가 정치인, 기자, 일반인까지 전방위로 통신자료를 수집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를 제공한 통신사에 대한 비판도 잇따르고 있다. 통신사들은 통신자료 제공내용 열람을 복잡하게 해놓고, 제공한 수치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에는 협조적이면서 이용자에게는 불친절한 통신사의 이런 행태가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통신자료 열람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9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김영식(국민의힘) 의원실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의뢰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2017년부터 통신 3사가 통신자료를 제공한 건수를 취합한 결과를 보면, 통신 3사는 매년 600만건 안팎의 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집계됐다. 가장 최신 집계인 지난해 상반기(2021년 1~6월)에는 약 256만건의 자료가 넘어갔다.
여기에는 공수처뿐 아니라 검찰, 경찰, 국정원을 포함해 사법경찰권이 부여된 관세청, 법무부, 법원, 고용노동부, 식약처 등의 행정부처가 포함된다. 사별 제공 현황은 통신사 측이 “가입자 이탈 우려 등의 사유로 외부 제공이 어렵다”라며 제출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았다.
김진욱 변호사(법무법인 주원)는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이 이용자 정보보호에 굉장히 예민한 것과 대조적인 행보다”라면서 “글로벌 기업은 기업가치 측면에서 이용자 정보를 함부로 제공하지 않는 것이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는다고 보지만, 국내 통신사들은 반드시 응할 의무가 없는 요구에는 쉽게 협조하면서 이용자들에게는 이를 찾기 어렵게 하고 있어 이용자 정책 제고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실제 애플은 홈페이지에 ‘우리는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사생활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라는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걸어 놓고 반기마다 투명성 보고서를 통해 각국 정부기관의 정보제공 요청 건수와 이에 응한 비율 등을 공개하고 있다. 애플이 공개하고 있는 최신 수치인 2020년 버전을 보면, 한국 정부는 기기, 계정 등에 대한 정보 338건을 요청했고, 회사 측은 이 중 85%(286건)에 대해 실제 자료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애플은 2015년 미 캘리포니아주에서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 당시 테러범의 아이폰 보안 기능을 해제해달라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큰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FBI는 ‘모든영장법’을 근거로 국가기관의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입장이었으나, 애플 측은 제조업체가 상품을 출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용자 데이터 제공까지 강제할 수 없다고 맞섰다. 데이터는 애플의 것이 아니라는 취지다. 이 사건은 FBI가 애플 협조 없이 암호화를 해제하는 방법을 찾으며 일단락된 바 있다. 이용자 데이터 제공에 관한 애플의 이런 원칙은 국내 수사기관 요구 등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애플 측은 “법률팀은 요청 건이 합당한 법적 근거를 갖추지 않았거나, 불명확하거나, 부적절하거나, 과도하게 광범위한 정보를 요구할 경우 이의를 제기하거나 요청을 거절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개인정보보호 전문가들은 최근 법조계와 시민단체, 국회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수사기관의 영장 없는 통신자료 요구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 논의보다 통신 사업자 스스로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우선이라고 보고 있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수사기관에서 얼마나 정보를 요구했고, 기간별로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지, 자사가 얼마나 이에 응했는지 등을 보여주는 투명성 보고서 공개나 개인정보 수집 기한을 단기간으로 제한하는 식의 방법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라면서 “이 자체만으로도 수사기관은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돼 불필요한 자료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가 2015년 1월부터 최초로 수사 기관으로부터의 이용자 정보 제공을 요청한 건에 대한 통계를 ‘개인정보보호리포트’를 통해 공개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연 2회 공개하는 투명성 보고서에서 이를 공개하고 있다. 카카오(035720)도 투명성 보고서에서 항목별로 자세하게 관련 정보를 제공 중이다. 현재 통신사의 관련 정보는 과기정통부가 취합해 반기별로 발표하고 있다. 사별 세부사항은 공개하지 않는다.
통신사들은 가입자가 수사기관 등에 개인정보를 제공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 또한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있어 논란은 가중되고 있다. SK텔레콤은 작은 글씨로 ‘개인정보이용내역’이란 메뉴를 찾아 ‘묻고 또 묻고’의 7단계 절차를 거쳐야만 이를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신청 절차 막바지에 가서는 마치 외부기관에 통신기록을 제공한 사실이 없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회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띄워 가입자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청 메뉴를 찾기조차 어려운 KT, LG유플러스도 그 단계만 약간 줄어들 뿐,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관련 내역을 알아보기 어렵게 한 것은 마찬가지다<1월 4일 자 공수처 무차별 통신조회에 열람 신청해보니… “통신3사 복잡한 절차에 메뉴 찾다 분통” 참조〉. 이런 복잡한 신청 절차는 전혀 개선 기미가 없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