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승인한 막전막후에는 미·중간 패권다툼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자국 공급망을 강화하면서 중국을 압박하는 정책을 취하는 가운데, 중국 역시 불안정한 미국 기업 대신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택했다는 것이다.

2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애초 중국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 승인을 지연할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뤘다. 앞서 미국이 중국 자본의 매그나칩반도체 인수를 국가 안보 문제를 거론하며 반대한 데 따른 것이다.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SK하이닉스 제공

미국은 자국 반도체 장비 회사 또는 미국의 기술이 들어간 장비를 제조하는 회사에 중국 장비 수출을 하지 않을 것을 종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상징한다는 칭화유니그룹은 파산을 맞았고,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SMIC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은 SMIC를 올해 초 무역 블랙리스트에 지정했으며, 현재 추가 제재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는 마땅한 대미 반격 카드가 없지만, 주요 인수합병(M&A)에 어깃장을 놓으며 미국에 대응하고 있다. 시장지배력을 키울 우려가 있는 M&A는 이해관계국의 반독점 심사기구가 기업결합이 온당한지를 판단해 M&A를 승인하는데, 이 제도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3월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일본 반도체 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의 M&A 승인을 지연하고, 지난 2018년에는 미국 퀄컴의 네덜란드 NXP 인수에도 몽니를 부렸다. 지난해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 인수 건도 지금까지 승인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는 실리가 작용했다. 미·중 갈등이 오히려 득이 된 셈이다. 앞서 미국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승인해 인텔의 자국 투자 길을 열었고, 중국은 미국 기업 대신 SK하이닉스로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한다는 차원이다. 또 SK하이닉스는 이번 승인을 계기로 대중국 투자를 늘릴 가능성도 크다. 업계 관계자는 "역설적으로 중국은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사업부의 주인이 되는 게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유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추가적인 투자와 고용도 기대할 수 있다"라고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후방지원도 한몫을 했다. 폭넓은 정재계 네트워크를 토대로 연내 인수 승인을 완료하겠다는 SK하이닉스의 계획을 뒷받침한 것이다. 최 회장은 베이징포럼, 상하이포럼, 난징포럼 등을 매년 개최했고, 보아오포럼에도 오랫동안 참여하면서 중국 정재계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여기에 지난 9월 서진우 부회장을 중국사업총괄로 임명한 뒤, 중국으로 보내 SK하이닉스 공장이 있는 우시와 인텔 낸드사업부 공장이 있는 다롄 정부 주요 관계자들에게 인수 승인 필요성을 설득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지난 2017년 일본 키옥시아 지분 투자에 대한 중국 승인 심사 때도 중국에 직접 날아가 정재계 주요 인사에 투자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 3월 SK하이닉스 대표이사로 취임한 박정호 부회장 또한 본인이 강점을 지닌 M&A에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국 승인에 앞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조기 승인에는 박 부회장의 활약이 있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박 부회장은 국내외 관계자들에 이번 인수 계약이 기업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모두 도움이 되는 일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각국 기업결합 승인 절차가 마무리된 데 따라 SK하이닉스는 본격적인 인수 절차에 돌입한다. 중국 승인이 나오면 올해 안에 1차 인수 대금인 70억달러(약 8조3500억원)를 납부하고, 중국 다롄 생산시설과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부문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인수 대금 납부는 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회사 관계자는 "그래도 이른 시일 내에 인수 대금을 내려고 한다"고 했다. 이어 2025년 3월 20억달러(약 2조3850억원)를 추가 지급해 낸드 지식재산권(IP)과 연구개발(R&D) 인력 등을 모두 흡수할 예정이다.